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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Aug 08. 2021

의사와 환자

[닥터스]베른하르트 알브레히트

1. 진료실에서 의사와 환자

한방 전공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입퇴원을 연례행사처럼 해서 전공의 사이에서 유명한 환자가 있었다. 분명히 나이롱 환자 같은데 아프다고 난리를 피우니 뭐라도 안 해줄 수는 없고, 하지만 진짜 아픈지 확인할 길은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휘둘려야 했던 환자였다. 한번 입원하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딱 그 범위까지 온갖 치료와 협진을 다 보고 퇴원한다. 회진을 가면 참 다양하게 아프다고 한다. 머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하지만 혈액 검사는 웬만한 전공의들보다 깨끗했고 X-ray를 찍어봐도 그 나이대의 퇴행성 변화 정도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프다는데 어쩌나. 진짜 아픈 환자들 때문에 처리할 일도 많은데 그 환자의 거짓말 같은 증상 호소에도 일일이 대응을 해야하니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그럼에도 다른 조치를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력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그 일이 있었을 때는 동기가 주치의를 맡고 있을 때였다. 옆에 다른 동기들도 같이 있다가 간호사 선생님 콜을 받는 걸 들었다. "아, 또 아프시대요? 하.. 이번엔 어디가 불편하시대요? 아, 저를 꼭 봐야겠다 하셨다구요?" 듣자마자 그 환자인 걸 모두 알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피곤한 얼굴로 다녀오겠다며 동기가 일어섰다. 그런데 한참 지났는데도 동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단단히 발목이 잡혀서 실랑이 중인가보다 하고는 나는 내 환자를 보러 병동으로 갔다. 그런데 간호사 스테이션 앞 컴퓨터에서 심각한 얼굴로 그 동기가 화면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했더니 그 환자분 뇌경색인 것 같단다. 평소에 늘 하듯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 해서 그럴 때 드리던 약이나 드리려고 했더니 평소에 아프던 거랑 다르다며 강경하게 머리를 찍어보고 싶다 하더란다. 바이탈도 멀쩡했고 겉으로 아무 이상도 없이 의사소통도 다 하고 있는 환자였기에 뇌경색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워낙 고집을 부리니 또 어쩔 수 없이 brain MR, CT를 찍었단다. 그런데 웬걸. 작긴 했지만 분명히 하얗게 병변이 보였다. 뇌경색이었다. 


타성에 젖어 환자를 보다가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다행히 이 환자는 스스로 의사표현을 잘 했으니 검사를 해서 실제로 병변이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지만,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환자였으면 더 위험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의식이 없는 중환자는 간병인 말에 의존해야 하는데 간병인이 꼼꼼하고 착실하지 않으면 증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늘 똑같죠 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생기기 십상이다. 이 책에 나온 발작 환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미 검사는 다 해봤고, 증상은 똑같고,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럴 때 새로운 환자를 보듯 처음부터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며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책에 나온 발작환자는 다행히 DNA mutation 문제임이 밝혀져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정신병원에 수용된 사람 중에서 이처럼 타성에 젖은 의사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서 뇌경색 이후로 그 환자는 더욱 기세등등해져 병원을 들락거렸다. 얄밉긴 했지만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여전히 연례행사처럼 입퇴원을 반복하는 그 환자를 볼 때마다 다시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뇌경색 환자와 이 책의 발작 환자 케이스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해야 하고, 환자의 증상 호소에 늘 귀를 기울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므로 경과기록에 무심하게 "repeat"을 쓰기 전에 의식적으로 깨어 있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2. 각자 삶의 여정에서의 의사와 환자

이 책에서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진료실에서의 단면적인 모습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진료를 의사와 환자의 삶이 잠시 만났다가 갈라지는 긴 여정의 일부로 바라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의사는 자신의 치료가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하며 진료를 한다. 그런데 환자의 삶에 의사가 미치는 영향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진료를 위해 일시적으로 만난 두 사람일 뿐, 환자의 삶은 진료 후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흘러간다. 그 방향이 의사가 원하던 대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한 에피소드마다 의사의 이야기와 환자의 이야기가 따로 나온다. 의사가 왜, 얼마나, 어떻게 그 질환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 환자를 만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환자는 어떻게 하다가 이런 병에 걸리고 이 병이 환자의 신체 건강뿐 아니라, 일상생활, 직장, 더 나아가 환자 가족, 친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예를 들면, 처음으로 기관 이식에 성공한 과학자, 의사 부부 이야기에서 진료를 하기까지 그 부부가 직장생활과 사생활의 구별이 없을 정도로 이식 연구를 해왔다는 맥락을 알려주었다. 한편 첫 기관이식을 받은 환자의 삶도 보여준다. 음독 자살 시도를 하게 된 이유와 기관이식수술이 성공적이었음에도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담담히 보여줬다. 몸의 문제는 고쳤지만 결국 자살에 이르게 한 절망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또다른 예로 샤르코 마리 투스로 인한 기형발 수술 에피소드가 있었다. 의사로서의 삶에서 잠시 만난 그 환자를 위해 의사는 발만 고칠 수 있었지, 그 이후의 삶은 책임질 수 없었다. 환자는 새 삶을 얻은 후 새로운 모험을 찾았고 그 때문에 가정이 깨졌다. 이 두 사례 모두 안타깝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여러 흐름의 삶이 뒤엉켜 살다보니 생기는 일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치료 후 환자의 가정이 깨진 것이 꼭 잘못된 일도 아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다르고 가정이 깨진 덕분에 새로운 변화로 좋은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온갖 방향과 색깔의 삶이 뒤섞인 세상에서 정답은 없고 삶의 거대한 흐름은 계속 흘러갈 뿐이다.


3. 사회 속에서의 의사와 환자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는 의사, 환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문화적 맥락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 책에서 나온 에피소드 중에서 만성통증환자를 도우려고 마약성 진통제를 써서 효과가 좋았지만 보험적용 대상이 아니라서 거금을 배상한 사례가 있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진료를 할 때 수가 문제가 크다. 특히 우리나라는 저수가 때문에 3차병원 쏠림현상이 심하고 이로 인한 3분 진료가 의료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의사도 환자에게 더 공감하고 오랜 시간을 쓰면서 편안한 진료를 하고 싶지만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에서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비슷한 예로 간이식 적응증에 관한 법이 바뀌어 이전에는 이식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이 지금은 그 대상에 해당하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의료는 의학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여러 차원의 배경 개선 또한 필요하다.


4.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는 의사와 환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17도씨 저체온증에서 살아난 환자 사례이다. 의대에서 배우는 의학이론은 확률적으로 높은 것 위주이지만 한사람한사람을 치료해야 하는 임상현장에서 낮은 확률의 경우를 맞닥뜨리는 경우가 분명히 존재한다. 배운 적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의사는 오롯이 주관적 선택에 따라 진료를 하게 된다. 책의 사례처럼 심한 저체온증에서 살아난 것, 그리고 저체온증 부작용인 허혈성 대장염이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54일이나 지난 후 발생한 것은 예측할 수도 없고, 그러므로 이후에 같은 일이 생겨도 예방할 수 없다. 임상 현장에서 의사로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때 무기력감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인간의 존엄성은 이러한 한계에서 오는 것이다. 한정된 수명, 돈, 시간, 체력과 같은 불완전함이 있기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피나는 노력이 가치 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그 이후의 일은 '주여, 뜻대로 하소서'(NON MEA SED TUA)라고 맡길 수 있는 용기, 진인사대천명의 태도가 필요하다. 불확실한 인생에서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서 환자의 하루하루를 지키되 그 이후의 일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5. 나가며

이처럼 '닥터스'에서는 의사 환자 관계를 진료실, 각자 삶의 여정, 사회,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는 측면에서 다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의사 환자 관계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하며, 의사 환자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여러 맥락에서 접근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진료를 할 때 질병과의 싸움을 넘어, 의사와 환자 모두의 삶에 진료가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사회의 영향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진인사대천명 할 수 있는 성숙한 의사가 될 수 있길 기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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