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녕, 헤이즐]
영화에서 헤이즐과 거스를 이어주는 핵심에 작가가 있었다. 작가가 쓴 책의 내용 자체가 좋았다기 보다는 헤이즐은 줄곧 책에 나오지 않은 그 이후 이야기를 궁금해했다. 헤이즐이 작가를 직접 찾아가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거스와 가족들의 삶이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자신을 수류탄이라며 자기가 폭발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칠 것을 가장 걱정하던 헤이즐이었다. 그런 헤이즐에게 거스는 그녀를 위한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살 순 없지만 누구에게 상처받을지는 결정할 수 있다고. 기꺼이 서로를 잃는 상처를 안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끊임없이 숨을 쉬고, 행복했으면서도 살아내느라 고통스러웠을 이 삶에도 마침표는 필요하다. 그렇게 먼저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는 것이고, 남은 사람은 그의 흔적을 사무치게 느끼며 살아가는 것 또한 이 세상을 살아내며 누릴 고통이 아닐까? 먼저 돌아간 그를 뼛속 깊이 그리워하면서도 세상에 남은 사람으로서 자기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 ‘그’라는 생명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예비의사로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에서 헤이즐이 암의 급성 악화를 보인 후 담당 의사 중 한 사람은 암스테르담 여행에 반대했다. 헤이즐 입장에서는 야속했겠지만 의사 입장에서는 환자 몸 상태를 고려했을 때 합리적인 반대였다. 내가 헤이즐의 주치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죽음은 어떻게든 미루고 막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면 여행에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보다 깊이 이해한다면 죽음을 의미없이 미루는 것보다 삶에서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여생을 더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환자 본인과 보호자 모두 암스테르담 여행을 강력하게 원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 여행을 한다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가슴 뛰게 보낼 수 있고 임종 시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할 수 있다. 환자의 신체적 조건에만 집중하기 보다 같은 인간으로서 보다 행복한 여생을 후회없이 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시한부 환자를 대할 때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대신 신체적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응급 상황에 대비한 약물, 비상 연락망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