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씨 인사이드'
목 위로만 움직일 수 있는 라몬의 생활은 언뜻 보면 지극정성으로 그를 간호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그를 찾는 친구들 덕분에 살만 해 보인다.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만한 큰일도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가랑비에 옷 젖듯 라몬이 서서히 살고 싶지 않아지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라몬을 대하는 태도에는 뿌리깊게 차별감정이 숨어있다. 라몬은 그를 찾아오는 여자들에게 일부러 성적 농담을 던진다. 짓궂은 농담 정도로 보이지만 그의 농담에 웃는 여자들에게 라몬은 정색하며 묻는다. 왜 웃느냐고. 라몬이 정상적인 몸 상태였다면 기분 나빠할 법도 할 성적 농담인데 여자들은 라몬이 사지마비 환자이기 때문에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않고 남자로 느끼지도 않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차별은 생각보다 교활하게 우리 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맞은편에서 오는 장애우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것도 못 본 척 지나간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장애우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또다른 차별일 것이다. 겉으로는 그를 모두 아껴주고 배려해주는 듯하지만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차별감정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차별을 느끼기에 라몬은 더욱 비참했을 것이다.
변호사 훌리아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온몸으로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고 함께 걸을 수조차 없다. 심지어 훌리아가 라몬의 등 뒤에서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몸을 움직여 쳐다보지도 못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형수를 부르는 것뿐인 라몬이 느낀 무력감은 얼마나 컸을까. 그의 무력감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상상 속에서 그는 창문 밖으로 날아가 훌리아가 있는 해변을 찾아가고 훌리아와 키스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라몬은 침대에 누워 슬픈 눈으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라몬에게 죽음은 끊임없이 묻는 것 같았다. 이래도 살고 싶냐고.
라몬은 기본적인 움직임조차 스스로 하지 못한다. 일정한 시간마다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누군가 체위를 바꿔줘야 한다. 다른 사람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스스로가 짐짝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움직일 수가 없으니 심지어 죽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권리를 주장한다. 삶은 권리이지 의무는 아니라고 하며. 라몬의 변호사 말대로 자살했다가 살아난 사람은 처벌하지 않으면서 존엄하지 못한 삶을 끝낼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처벌하는 법은 라몬의 입장에서는 불합리하다. 법을 바꾸진 못했지만 결국 주변의 도움으로 라몬은 삶을 마감한다.
그와는 반대로 훌리아는 존엄사를 택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간다. 라몬과는 다르게 주어진 여건에 감사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던 훌리아의 삶을 라몬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퇴행성 질병에 걸린 훌리아는 이제 라몬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대화다운 대화조차 불가능하다. 그녀를 그녀답게 만들어주던 것이 없어졌다. 정신이 온전할 때, 훌리아는 라몬이 다치기 전 건강할 때의 사진을 보면서 점차 퇴행성 질환으로 인해 변해갈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여러 번 죽고 싶었지만 남편의 만류로 시간을 끌다가 결국 훌리아는 이성적으로 그녀다운 결정을 내리는 시기를 놓쳤다.
죽음을 금기시하고, 삶은 아무리 힘들어도 죽음보다 낫다는 이분법적 인식은 존엄하게 죽을 권리뿐만 아니라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조차 박탈한다. 인간으로서의 명예로움과 존엄성이 훼손되고 자기다움이 없어진 상태일지라도 어떤 인공적인 방법이든 써서 숨을 붙어있게 만드는 현대 의학에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