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모순>을 읽고
※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책을 읽는 동안 유독 떠오르는 친구가 있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이 정도면 모든 조건이 충분하고, 너무나 좋은 사람인데 헤어졌다고 말하던 친구가 괴로워하며 연락이 왔다. 너무 힘들어하던 친구에게 나는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들어 위로하려 했지만, 사실 한 순간도 공감하지 못 했고 그 친구는 아무런 위로를 얻지 못했다. 당시에는 찜찜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고민을 미뤄뒀지만, 책을 읽으며 그 때 그 아이의 마음이 그려졌다. 행복과 불행의 형태가 달랐을 뿐, 설명할 언어가 미처 모자랐을 뿐, 그 때 정말로 괴로웠겠구나, 싶었다.
위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네가 옳다'거나 '틀려도 괜찮다'라던지, 그런 것과 무관하게 '너를 이해한다'는 위로도 있다. 어떤 종류든 듣는 사람의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좋은 위로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정답은 없다'는 위로를 가장 좋아한다. 한 때 이 말만큼 무서운 말이 없어서 진진의 어머니처럼 닥치는 대로 내 고민과 결이 비슷한 책을 찾았던 적도 있다. 뭐라도 정답을 찾지 못하면 실패할 것 같고, 돌이킬 수 없을 거란 불안함에서였다. 지금의 내겐 인생에 주어진 수많은 선택이 행복과 불행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복과 어떤 불행을 택하느냐로 귀결된다는 말이 가장 위로가 된다. 더 이상 정답을 찾으려고 선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까.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깊숙이 느낀 감정은 위로였다. 아무것도 정답이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틀린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위로였다. 이 책은 적당한 감정과 적당한 근거로 행복과 불행, 그리고 둘에 관한 일련의 맥락으로 나를 설득한다. 진진의 시선이지만 사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없었다. 어떤 사랑을 택했다는 이유로 '결혼은 뭐가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해설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진진은 자신이 겪을 행복과 불행을 충분히 상상했고, 관찰했고, 고민한 끝에 행복과 불행의 형태를 모두 감당하겠다는 선택을 했다. 물론 다가올 행복과 불행을 모두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선택의 과정은 충분히 존경스러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민만 많던 스무살 초반에 사랑의 정답을 찾겠다는 무모한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책도, 영화도, 연애도 경험할수록 혼란스러웠다. 그 모든 사랑의 형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얼굴마다 다른 사랑이 떠오른다. 괴로워서 도망치고 싶던 사람, 지나치게 솔직했던 사람, 있는 대로 착한 척과 멋있는 척하며 결국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던 사람. 돌이켜보면 힌트는 많았다. 누가 진짜 사랑이었을까라는 질문이 무의미할 만큼, 틀린 바 없이 모두 사랑이었다. 난 진짜 사랑을 찾으려하기 보다는 그 모든 사랑을 더 진지하게 대했어야 했다.
이모와 엄마의 선택을 나약함과 생존력으로 구분하거나, 사람은 누구나 공평하게 행복과 불행을 나눠가졌다는 말로 설명하기는 아쉽다. 누군가는 삶으로 죽음을 견뎠고, 누군가는 죽음으로 삶을 견뎠을 뿐이다. 진진의 시선이 좋았던 건 단 한 명도 닮은 구석이 없는 모든 사람을 나름의 이유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위로는 나만큼 상처를 가진 사람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딱 이 모든 인물들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위로하려는 작가의 마음 같았다. 누구 하나 깨지지 않은 사람 없고, 누구든 각자의 모양대로 행복과 불행이 있다는 위로 아닐까.
정답을 찾으려다보면 모순이 생긴다. 정답이 있으면 오답이 있어야 하고, 정답과 오답이 나란히 있을 때 모순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행복없는 불행'이나 '불행없는 행복'같은 정답 찾기만 내려놓는다면, 사실은 모두 익숙할 만큼 가까이 있는 것들이다. 돈이 없어서 돈을 가장 좋아하고,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도 들여다보면 얼마든지 이해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