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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Aug 12. 2018

쉬는 날, 아무것도 안 했다는 이들에게

일기장을 세 페이지나 채웠는데

오늘은 월차.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다. 늦잠을 잘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몇 분을 더 자도 불안할 일이 없는 날이라는 게 좋았다.


"아휴,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아" 투덜대면서도 계획을 착착 세우고 뿌듯함을 느낀다.

오늘 마감 기사와 회의 발제안을 간단히 마무리 짓고 청소를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청소를 하면 마음이 좋아진다. 이불빨래는 오래 걸리니까 먼저 세탁기를 돌려놓고 바닥청소를 시작했다. 내 방, 그다음 거실.


청소를 하다 보니 헝클어진 전기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불편한 걸 알면서도 계속 방치해뒀다.

오늘은 이 전기선을 정리하는데 기꺼이 시간을 쓰고 싶었다. 그러다가 서랍장 위 먼지가 눈에 띄어 닦았고, 책이 쌓여 있는 게 마음이 쓰여 책꽂이에 착착 꼽았다. 이제 거실. 바닥을 쓸면서 냉장고 문에 묻은 얼룩을 지웠고 개미 몇 마리가 나와 기겁하며 고이 보내주었다.


빨래를 하는 동안에는 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 예능 보고 빨래 널은 다음에 씻어야지!

한 번의 빨래를 마치고 샤워를 한 뒤 그다음 빨래를 또 돌렸다. 이불 양이 많아서 한 번에 다 들어가지가 않는다. 그러고 나니 배고픔이 느껴졌다.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었다.


그대로 나가 케이크를 샀다. 밥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라면과 김밥도 사 왔다. 

한 발자국만 밖에 나가도 땀이 주룩 나는 날씨였는데, 평소였다면 귀찮아서 식욕을 억눌렀을 텐데 이 날은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해가 지기 전 시간, 오후 6시쯤. 올드팝을 틀어놓고 책을 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하루의 끝이라고 생각해 이것저것 시작하는 걸 포기해버렸던 시간이기도 하지만, 여름의 해는 길기 때문에 전혀 조급하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동생과 엄마가 집에 와 함께 돈까스와 냉면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 나의 하루를 본다면, 뭐 한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벌써 일기장 세 페이지를 채웠다. 이만큼이나 쓸 게 있는데 한 게 없다니. 그건 모순이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느낀 하루였다. 

사실 휴무 전날에는 늘 술을 과하게 마셔 숙취에 시달리며 하루를 공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하루를 온전히 쓸 수 있었던 휴무다운 휴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에 쫓기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없었다.

내가 내키는 시간에 일어나 먹고 싶은 걸 먹고, 굳이 씻는 수고를 하며 잠깐의 외출을 하고, 책을 몇 장 보지 못했다는 압박감도 없고. 온전히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내 뜻대로 행동했던 날인 거다. 


그 어느 하나 군더더기가 없었다. 어떻게 하루가 갔는지 모를 상태로 시간을 쓰지 않았다. 소소하지만 내가 원하는, 결코 의미 없지 않은 여유를 누렸다. 이런 하루를 감동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 상태인 것도 좋고, 단 하루라도 평화로울 수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다.



/2018.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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