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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Aug 04. 2024

무조건 하세요

mayol@골계전 22. 서점에서 만난 모녀

 실없이 웃음이 나오는 날도 있고 그냥 실없는 날도 있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배경으로 나오는 사십계단에 앉아 박중훈이라는 영화배우를 생각하니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20대 후반의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강남역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신호대기 중인 버스에서 차창을 보니 뉴욕제과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때는, '야, 뉴욕제과에서 만나자.'했을 정도로 유명한 강남의 랜드마크였던 제과점이었다.

 혹시나 아는 친구가 빵집 앞을 서성대고 있지 않나 차창밖을 살피고 있는데 버스 안의 라디오 방송에서 영화배우 박중훈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뉴욕에도 없는 뉴욕제과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요."


 다름아닌 뉴욕제과 광고였다. 유머가 넘치면서도 흡입력 있는 광고라는 생각이 들며 웃음이 절로 나왔던 기억이다.

 뉴욕에도 없는 뉴욕제과라니, 하하하.

 그런 기억에 실없이 웃으며 엉덩이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 책방골목으로 들어선 날이었다.




  일 년이면 서너 번씩 방문하는 헌책방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미시족 엄마가 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는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쩍 벌리며 소리쳤다.


 "와~ 책 많다~아."

 "그렇제. 책이 어마어마하다 아이가."


 아이와 엄마는 책방이란 곳을 처음 들어와 보는 사람들처럼 눈과 입을 다물지 못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손에 음료수를 들고 다니는 아이와 엄마가 못마땅했던지 주인아주머니가 일부러 다가와 으름장을 놓았다.


 "니 거 여기 흘리면 책값 다 물어내야 한데이."


 그제서야 아이와 엄마는 음료수를 버리고 들어와 다시 책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녀의 소란은 잠잠해졌지만 내 속은 시끄러웠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어서 몇 권 집긴 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였다.

 사긴 부담되고 그냥 내려놓기에는 아깝고 해서 책을 살펴보고 있는데 옆에 누가 있는 것 같았다. 엄마와 함께 들어온 아이였다.


 "어? 너 왜 혼자야? 엄마 어디 가셨어?"


 언제부터 내 옆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따라다닌 모양이었다.

 아이가 낭랑한 부산 말씨로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무슨 책을 보고 있으세요?"

 "으응, 아주 오래된 여행 책이야."

 "얼마나 오래됐는데요?"

 "글쎄… 한 70년도 더 됐을걸?"

 "와… 정말 오래됐네예. 근데 그거 재밌어요?"

 "그럼, 아주 재미있지."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돌려 소리를 질렀다.


 "엄마야, 여기 재미있는 책 있단다~"

 "어… 아니야, 아니야, 이 책은 아저씨한테만 재미있을 거야."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마까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때 내 손에 들고 있던 책은 김찬삼 선생의 세계 여행기 시리즈 책이었다.

 여러 권이 묶여서 나온 책인데, 한문과 한글이 섞인 세로 쓰기 책이었고 사진도 색이 바랜 흑백사진들로 채워져 있어 영 세련되지 못했다.


 "호호호, 선생님. 이 책이 무슨 책이에요?"

 "아, 네. 이 책은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하신 김찬삼 선생의 책이고 아프리카에 갔을 때는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주절주절 어쩌고 저쩌고…"


 나는 두 모녀를 위해 내 손에 쥐어진 책에 대해 설명을 했다.


 "와. 선생님. 강의하셔도 되겠다."


 엄마가 합장을 하며 나를 우러러 바라보았다.

 아이도 엄마를 따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나는 마치 현찰사 주지스라도 된듯한 기분이 들어서 불경을 멈출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현찰사 주지스'가 무슨 말이냐고? 골계전 1화에 그분의 캐릭터가 묘사 되어있으니 찾아 읽어보시면 참고가 될 것 같다.

 아무튼, 장황한 설명을 마치고 서가에 다시 책을 꽂아 넣는데 젊은 엄마가 딱 붙어 서서는 주문이라도 외듯이 속삭였다.


 "선생님, 꼭 강의하세요. 정말 좋아요."

 "아니, 아무나 강의를 한답니까. 말씀은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꼭 하세요.”

 “아유, 도대체… 천만의 말씀이에요."

 "어머머, 무슨 말씀이세요. 무조건 하세요."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소용이 없었고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모녀 뭐야?’ 이런 생각이 들며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아니, 도대체 무슨 강의를 해요. 이제 그만 쫓아오세요. 제발요."

 "아니, 아니 선생님, 꼭 강의하세요. 무조건 하셔야 해요."

 "아니, 도대체 왜 그러세요. 도대체 뭘요, 뭘!"


 뭘 무조건 하라는 건지 두 모녀는 이쪽 서가로 가면 이쪽 서가로 쫓아와, '꼭 하세요'. 저쪽 서가로 가면 저쪽 서가로 쫓아와, ‘무조건 하세요’. 지하로 내려가면 지하로 쫓아와, ‘꼭 하세요’.

 마치 몰래 카메라의 미션을 수행하는 사람들 같았다.

 결국 책은 제대로 고르지도 못하고 눈에 띄는 대로 두어 권 집어 들고는 두 모녀를 피해 탈출하듯 밖으로 나와버렸다.

 서점을 나와 40계단 쪽으로 다시 길을 건너는데 두 모녀의 찢어질듯한 큰 목소리가 신호등 저편에서 합창하듯 들려왔다.


 "선생님, 무조건 하세요~~~!!"

 "아저씨, 무조건 하세요~~~!!"


 횡단보도를 건너던 사람들이 책이 든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두 모녀를 피해 총총총 뛰고 있는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실없는 날이었다.

참 끈질긴 모녀였다. 또 목소리는 얼마나 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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