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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Aug 11. 2024

다리찢기

mayol@골계전 23. 남자의 태권도

 입대날짜를 훨씬 넘긴 여성들도 아들들 대신 군생활을 단톡방에서 한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30도를 넘는 삼복더위가 시작되면 부대장에게 연락해서, '내 아들만은 행군에서 빼달라'거나 영하로 곤두박질치면, '내 아들만은 혹한기 동안만이라도 집에 다녀가게 해 달라'거나 아무튼, 군생활에 직간접으로 관여한다고 하니 이쯤 되면 아들들 대신 군생활을 해도 전혀 문제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도 아들 대신 치를 기세다.

 그러면서도 남의 편이 군생활하면서 축구했다는 얘기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 인상을 찌푸린다니, 남자들이 군에 가서 고무줄놀이나 줄넘기하는 줄로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엄마, 나 어제 부대장님과 고무줄 놀이 했어요. 신상병이 달려와 날카로운 이빨로 고무줄을 끊는 바람에 부대장님 얼굴에 맞았지 뭐예요. 그래도 철창신세는 면할 것 같아요."

 "옴마야, 신상병이 죽으려고 별짓을 다하는구나. 부대장님께 위로한다고 전해줘라. 앞으로 고무줄 놀이할 때는 사주경계를 반드시 하라고 하고. 너는 안 다친 거지?"

 "그럼요. 다음 주엔 전투력 측정이 있어서 온 부대원이 모여 줄넘기 시합을 할 거예요. 엄마 입던 치마 보내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아들아. 짧은 걸로 보내줄게. 그래야 잘 안 걸려. 덜렁거리면 민망하니까 속 옷은 꼭 챙겨 입고! 울 아들, 퐈이링!"


 오늘은 고무줄놀이나 축구 얘기가 아닌 태권도 얘기 하나가 생각난다.




 잘 아는 이야기지만, 대한민국에서 군 생활을 하려면 태권도 단증이 필수다.

 따라서 군생활을 무사히 마친 나는 자타공인 대한민국 육군 태권도 공인 1단이다.

 태권도 단증 없이 입대한 내가 자대에 배치를 받고 체력단련 시간이 되자 태권도 단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해 세웠다.


 “야, 줄 똑바로 안 서!”


 중대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한민국 군인이 태권도를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 말이야!!”


 중대장님은 시범조교를 내세워 발차기 품새 등을 보여주었다.

 내 옆에는 우리 내무반의 최고참 이 병장님이 서 계셨다.

 뭐가 불만인지 삐딱하게 서서는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진짜 못 해 먹겠네. 내가 이게 벌써 몇 년 째야.”


 그랬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이 병장님이었지만 1단을 따지 못하면 제대가 안 된다는 사실.

 그때 처음 들은 얘기였다.


 “야, 이 병장,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너 제대나 제때 할 수 있겠나!”


 옆에 서 있던 나도 바짝 긴장이 되었다.

 단증을 따지 못하면 제대가 안 된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 아니겠나.


 "조교 앞으로."

 "앞으로!"


 늘씬한 근육질의 조교가 단상으로 올라와 현란한 몸짓을 선보였다.


 “자, 품새랑 기본자세를 잘 봤겠지. 지금부터 다리 찢기를 실시하겠다. 모두 좌우향 우!!”


 하필이면 이 병장님과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성격 좋은 이 병장님은, 160cm가 조금 넘는 작은 키에 왜소하게 생긴 평범한 사내였다.

 눈꼬리가 지나치게 늘어져서 지금쯤은 입꼬리와 서로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있던 부대는 기갑부대였고 이 병장님은 베테랑 장갑차 조종수였다.

 훈련 중에 조종석에 파묻혀 앉아 있으면 체구가 작아 밖이 잘 안 보인다고 했다.


 “아... 밖이 안 보이면 어떻게 운전을 하십니까?”


 높게 자란 가로수를 보면서 운전한다고 하더라고.

 햐, 기가 막힌 노하우 아닌가.

 어느 날은 시골 방앗간 벽을 무너뜨린 사고가 있었는데 무슨 일인가 물어봤더니,


 “작전 중에 갑자기 가로수가 안 보이는 길로 들어선 거야. 우하하.”


 다시 연병장,

 우리는 진지한 자세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그날따라 이 병장님은 체육복을 입지 않고 잘 다려진 군복 바지를 딱 달라붙게 입고 나왔다.

 칼같이 다려진 군복 바지를 입은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이 병장님, 체육복은…?”

 “어떤 쉐인지 잡히면 죽여버릴 거야.”


 나도 신병이라 체육복을 새로 지급받기는 했는데, 그다음 날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결국 다른 중대에 기어들어가 체육복을 한 벌 훔쳐 입었다. 그런 걸 병영에서는 ‘위치 이동’이라고 부른다. 오해하지 마시길. 절대 ‘절도’는 아닌 거다.

 아쉽게도 내가 훔쳐온 아니, 위치 이동해 온 체육복 바지의 무릎은 백 년은 입은 것처럼 축 쳐져 튀어나왔고 허리의 고무줄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게 헐렁했다.

 바짓단은 다 해져서 너덜너덜했고 엉덩이도 천이 얇아져서 곧 뚫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와중에 허리춤에는 바지 주인의 이름까지 매직으로 크게 쓰여 있더라고.


 “야, 너 이제 그 바지 주인한테 걸리면 디졌어. 걔 엄청 성질 드러운 얘야. 얼른 허리 한 번 접어.”


 이 병장님은 친절하게 병영에서의 생존방법을 알려주었다.

 말씀대로 허리를 접으니 가랑이와 엉덩이가 꽉 끼어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그때 중대장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자아~ 좌측에 있는 병사의 어깨에 우측에 있는 병사의 다리를 올린다. 실시!”

 “실시!!!!”


 나는 이 병장님의 우측 다리가 내 어깨에 잘 걸쳐질 수 있도록 자세를 한껏 낮췄다.

 그런데 자세를 낮추는 순간, '툭'하고 훔쳐 입은 체육복 바지 엉덩이가 터져버렸다.  

 헐...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엉덩이만 터진 게 아니고 허리를 접은덕에 꽉 낀 가랑이도 일부 균열이 생겼더라고. 대한민국 국군 전용 흰 팬티가 다 보인 거지.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 이제 발목을 잡고 일어서~엇!”


 내가 벌떡 일어서자 이 병장님의 입에서 방언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야, 야, 야!!! 마요르~!!! 너 이런 제기랄. 그렇게 벌떡 일어나면 어떡해. 가랑이 찢어진다. 에고 죽겠네. 너 얼른 안 앉아!! 아구아구아구 나 죽네..."


 그때 박격포 같이 묵직한 중대장님의 목소리가 우리 둘 사이로 날아와 떨어졌다.


 “야, 거기 이 병장~ 너 입 안 닥쳐. 앞에 신병 보기에 창피하지도 않나. 입 닥치고 다리 찢기나 해!”


 이 병장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자세를 낮출 수가 없었다. 내 엉덩이가 터졌는데 어떻게 낮추냐고.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이 병장님의 바짓가랑이가 쩌~억 하고 벌어졌다.

 군인들이 말년에 멋을 내려고 옷을 직접 수선해 입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병장님의 바지가 그런 상황이었다.

 속옷을 생략한 이 병장님의 바짓가랑이 사이로는 소형 주전자 귀고리 모양의 남성 전용 액세서리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내 다리는 그때 다 벌어져 버렸다. 여태 두 다리가 하나로 붙지를 않아 아장아장 걷고 있다.


 “야, 너 이쉐이. 눈 안 들어?!!”


 이럴 때 절대 배시시 미소 지으면 안 된다.

 고개를 들어 이 병장님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자세를 곧추 세웠다.

 그 순간, 이 병장님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로 강시처럼 총총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도 왼쪽 어깨에 올려져 있는 이 병장님의 발목을 잡고는 졸졸졸 뒤뚱뒤뚱 따라가기 시작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군 연병장 꽤 넓다.

 더구나 온갖 중화 무기와 장갑차들로 채워진 연병장이 오죽할까.

 그 모습을 본 중대장님이 나와 이 병장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저것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중대장님의 벼락같은 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병장님은 계속 고통을 호소하며 뒷걸음질을 쳤고 발목을 꼭 잡은 나는 계속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야, 야, 야~아.... 나 가랑이 찢어진다. 자세 좀 낮춰봐. 야, 이쉐이, 너 눈 안 들어?! 우아아아아, 사람 죽네…”


 눈을 들면 자세가 높아지고 시선을 내리면 안 본 눈 사야 할 것 같고…

 그렇게 시력을 망쳐가며 이 병장님을 덜덜거리며 쫓아가고 있는데, 중대장님의 근엄한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다른 사병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의 귀에도 들려왔다.


 “자, 이제 발 바꿔!”


 그날 저녁 이 병장님의 찢어진 바지를 꿰매 주고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자기 전까지 얼차려를 받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군대에서는 병장이 막내 이등병을 혼내는 법이 거의 없다.

 이 병장님의 사주를 받은 신 상병님이 얼차려를 주었는데 나를 쳐다보는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분도 단증이 없었으니까.

 얼차려를 받는 와중에도 나는 신 상병님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다음엔 니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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