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ol@골계전 34. 핑계
요즘은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앉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환쟁이도 아니면서 왜 그림을 그리냐 묻겠지만, 나는 순전히 관찰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
숲만 보다가는 내 글이 한 줄로 끝날 것만 같은 강박증도 한몫하고 또 그림을 그리다가 보면 관찰력이 생겨 머릿속에 쌓인 녹이 닦이면서 뇌의 활동량이 증가하는 것도 큰 재미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수필이라는 걸 잘 알지 못했다.
시와 소설을 위주로 글을 썼지 수필이나 산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SNS라는 것을 접하게 되면서부터 소소한 일상에 대한 기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은 수필 흉내를 곧잘 내는 것 같다.
언젠가 수필가이자 비평가였던 윤오영이 이런 말을 했었다.
소설 특히 단편에서 그 說話性설화성을 배제하고 그 企劃性기획성을 탈피하고 그 가설무대를 철거시키고 詩的시적 情緖정서, 峻烈준열한 비판정신, 閃光的섬광적인 진리를 솔직 미려하게 빛낼 수 있다면 수필문학은 확립될 것이다.
[가설무대를 철거시키고 ... 진리를 솔직 미려하게 빛낼 수 있다면 수필문학은 확립될 것이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비평가 차주환이 윤오영에 대해, [... 소설의 구체적인 서술성敍述性과 詩의 다채로운 縮約性축약성이 무리없이 조정되면서 眞진과 美를 구심점으로 하는 비판정신이 사려져 있는 독립된 문학 쟝르로서의 세계를 실감하게 되었다. ... 우리가 지금의 단계에 와서나마 윤오영씨 같은 수필가를 갖게된 것은 우리 문학을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고 설명한 바가 있다.
농담에도 격이 있듯이 칭찬에도 격이 있는 데 윤오영을 칭찬하는 차주환의 격이 보인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이다.
또한 수필은 그 길이가 얼마나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런 궁금증은 윤오영의 수필 한 편에서 쉽게 해소가 된다.
溫突온돌의 情정
눈이 펄펄 날리는 벌판을 끝없이 걷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불을 끄고 흐(희)미한 창문을 바라본다. 그러면 소창素窓(하얀창문)밖에서 지금 끝 없는 백설이 펄펄 날리고 있는 것이다.
고요한 밤에 말 없이 다소곳이 앉은 여인과 있어보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화로에 차茶물을 올려 놓고 고요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바글바글 피어 나는 맑은 향기에서, 고운 여인의 옥향목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끝없이 아득한 옛날이 그리운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골통대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그러면 선향線香같이 피어올라 안개같이 퍼지는 속에서 아득한 옛날의 전설이 맴도는 것이다.
달밤의 고요한 호수가 그리운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한길로 난 들창을 열고 넓은 터를 내다본다. 그러면 높은 외등이 달빛같이 비춰 광장에 호수같이 고여 있는 것이다.
혀끝으로 다향茶香을 음미하여 책상 머리에 앉으면, 누가 똑똑 창문을 두드리며 찾아 올 것만 같은 때가 있다. 그런 때면, 나는 잊었던 옛 친구를 생각한다.
서랍을 열고 묵은 원고를 들춰, 다시 읽어보면 옛 얼굴이 목화 송이처럼 떠오르고.
책은 손때 묻은 책이 정겨웁고, 붓은 손에 익은 만년필이 좋다. 여러 번 읽던 책이 옛 친구같이 반갑고, 전의 즐거웠던 기억이 새로우며, 손에 익은 붓이 하얀 원고지 위에 솔솔 흘러 내리는 푸른 글씨가 나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방은 넓지 않아 오히려 아늑하고, 반자 무늬는 약간 그을은 것이 오히려 그윽하다.
천길 만길 깊이를 모를 해저海底, 구만리 창공 끝없는 허공이 그리운 때면, 나는 배개 위에 고요히 누워, 눈을 스르르 감아보는 것이다.
<양인대작산화개兩人對酌山花開> 친구와 술을 마시며 정담情談을 나누고 싶고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 산악이 그리운 때면, 책상 머리에 도사리고 앉아 책 갈피를 제쳐가며, 회심의 글귀와 쾌재의 문장을 찾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내 한 칸 온돌방의 정서다. 그러나 한스럽게도 왕유王維나 도연명陶淵明의 경지를 얻지 못하여, 백향산白香山의 세간에 대한관심과 원사종院嗣宗의 미친 버릇을 버릴 길이 없어, 때때로 뛰쳐나와 가로수 밑에 오롯이 서 있는 것이다.
- 1975, 윤오영
글자를 아무리 키워도 지면을 다 채우기 힘든 짧은 수필이다.
수필이나 산문이라고 해서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원고의 양을 늘리는 경우가 많은데, 마치 방송분량을 채워야 하는 강박증 환자처럼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리지 않아도 된다는 표본이다.
해야 할 말만 쓰면 된다.
윤오영의 수필은 그의 나이 50이 넘어서 쏟아져 나온 것들이다.
그 후로 마치 ‘필봉筆鋒에 신神’이 들린 것 마냥 다작을 했다.
나 역시 SNS를 접하고 나서 쓴 수필이 약 3,000편 정도 된다. 개중에는 쓰레기통에 넣어야 할 글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덕에 글이 간결해지고 있으니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간결을 핑계로 도화지를 펼치는 이유를 갖다 붙여도 좋을까.
63빌딩을 설명하면서 100층 정도 되는 건물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잖은가.
모든 건 다 핑계에서 비롯된다.
잘 쓰고싶은 핑계에 기대보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