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ol@골계전 35. 사람 죽이는 매너
100년이 넘은 무쇠솥에 케냐 AA와 예가체프 생두를 넣고 두 시간에 거쳐 들들 볶는다.
센 불과 중불과 약불을 조절해 가며 팝업을 기다렸다가 색의 변화를 주시한다.
시간을 조절해 여름에는 신맛을 나게 하고 날씨가 지금처럼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신맛을 줄인다.
처음에는 6:4의 비율로 섞었는데 지금은 5:5로 블랜딩을 해서 사나흘 숙성시킨 후에 먹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색이 바랜 자센하우스 목재 밀에 블랜딩 한 원두를 넣고 갈기 시작하면 방안에 커피 향이 퍼지기 시작한다. 나는 이때부터 커피를 마신다고 생각한다.
곱게 갈아진 원두를 비알레티 모카포트에 꾹꾹 눌러 담고 불 위에 올린다. 중불에 약 2분 37초 34~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향긋한 에스프레소가 강력한 압력에 못 이겨 솟아오르기 시작하는데 그 사이에 우유를 미리 데워놓고 기다린다. '부르르륵' 소리와 함께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소리가 들리면 불을 끄고 데워진 우유를 수동거품기에 넣고 위아래로 왕복운동을 한다. 처음에는 쉽게 오르내리던 손이 거품에 의해 조금씩 무뎌지면서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진득하고 밀키한 거품이 완성된다. 그러면 적당량의 에스프레소를 잔에 붓고 그 위에 낙차를 가해 우유거품을 올린다. 단맛을 좋아했던 엄마의 커피잔에는 설탕을 뿌려 드리기도 했다.
20년이 넘는 아침 습관이다.
한때 기기를 선물 받아 캡슐커피를 먹어보기도 했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의학계에서는 커피가 장수를 돕는다는 발표도 있었고 각성효과로 인해 머리를 맑게 해 준다는 말도 있지만 나에게 해당되는 효과는 아닌 듯싶다. 우유로 인해 쾌변을 달성하고 카페인에 의해 더부룩해진 속이 식욕을 억제하는 효과를 즐긴다고나 할까. 끊지 못하는 마약 같은 루틴이다.
이런 커피 사랑에도 불구하고 커피 때문에 죽을뻔한 일이 있었다.
가로수길 옆 사무실에서 나와 골목을 두 번 접으면 모퉁이 꽃집을 지나 종종 찾던 샤이바나라는 미국 남부식 식당이 보였다. 그 앞으로 조금 걸어 나가면 우측으로 지금은 사라진 '압구정 웃는 카페'가 있었다. 사무실에 있다가 조용히 있고 싶어지면 노트북을 들고 그 커피숍으로 향하곤 했다.
어느 날인가 눈인사만 나누던 미모의 바리스타가 다가와 주문하지도 않은 잔을 내밀었다. 커피맛을 좀 봐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미 커피가 있다는 사인을 보냈지만 맛보기라면서 빙긋이 웃었다. 내 잔을 옆으로 밀어 놓고 받은 잔의 커피를 마셔보았다. 맛이 좀 복잡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맛이 어떠세요?"
"음... 텁텁한 뒤끝이 좀 있지만 케냐맛도 나고 인도네시아나 태국의 신맛도 살짝 섞인 듯도 하고요..."
자주 찾던 단골집이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데다가 바리스타의 상냥한 눈빛에 매료되어 알고 있는 커피이름은 죄다 갖다 붙였다. 내 말을 들은 바리스타가 환하게 웃었다.
"호호. 남은 원두 다 섞은 거예요. 저도 무슨 맛이 날까 궁금했네요. 호호호."
'쩝.'
바리스타의 몰모트가 된 그날 마음이 상해 고개를 푹 숙이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날 위해 웃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그날도 노트북을 들고 들들 볶는 카페를 찾았다. 다시 봐도 이쁜 바리스타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계산대에 서서 주문을 하면서 말했다.
"저 오늘 돈 낸 것만 마실 거예요."
"아, 네. 호호호."
계산을 마치고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그날따라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돌아보니 영화배우 박보영 씨가 친구와 너털웃음을 쏟아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소란을 피해 자리를 옮기려고 엉덩이를 들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내려놓았다.
'내가 언제 영화배우 옆자리에 앉아 보겠어.'
커피를 홀짝 거리며 은근히 옆자리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바리스타가 수프그릇만 한 머그잔에 커피를 잔뜩 채워왔다. 당황한 내 눈빛을 본 바리스타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급 원두 몇 개가 들어왔는데 맛을 좀 봐주세요."
눈빛과 매너가 사뭇 진지했다.
상황이 그려지실지 모르겠다. 나름 이름 있는 카페의 바리스타가 이름 모를 손님에게 커피 테이스팅을 부탁하는 아주 고급진 장면 말이다. 그것도 사람도 많고 옆자리에는 무비스따~아까지 있는데.
나는 옆자리를 곁눈질하며 발을 바꿔 꼬았다. 그날따라 발등을 살짝 덮은 로퍼도 괜찮고.
수다를 떨던 박보영 씨와 그녀의 친구도 대화를 멈추고 의아하다는 듯이 나와 바리스타를 번갈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바리스타가 다른 테이블을 보면서 던진 멋진 한 마디,
"아, 이 선생님이 커피를 잘 아셔서요. 호호호."
다른 손님은 이런 공짜커피 꿈도 꾸지 말라는 일종의 어나운스였겠지. 정말 아름다운 광경 아닌가.
그럴 땐 커피를 바로 입에 쏟아부으면 안 된다.
먼저 잔에 코를 대고 몇 번 소리 나지 않게 끙끙댄 후에 와인을 마시듯이 '호로로록' 공기와 섞어서 맛을 느끼는 척해야 한다. 마치 와인을 입 속에서 디캔팅하듯이 자연스럽게. 그런 후 수저 하나 분량의 커피를 혀뿌리까지 깊이 밀어 넣고 입을 오물딱 조물딱 한다. 그다음 '꿀꺽'. 소리가 좀 나도 좋다. 그리고 그다음의 자세가 몹시 중요하다.
우선 꼬았던 다리를 풀고 팔꿈치를 테이블에 살짝 기대면서 선글라스 너머로 바리스타를 지긋이 바라봐준다. 이런 상황에서, '언니, 이거 어디 거예요?'라고 물으면 절대 안 된다. '어딜꺼 같아요?'라고 되물으면 끝장이니까. 'North Korea?' 이럴 수는 없잖은가. 그냥 낮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고급 영어를 섞어서,
"Good인데요."
바리스타의 천사 같은 미소와 주변 테이블에서 쏟아지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들.
나는 내가 산 커피와 바리스타가 가져다준 커피까지 순식간에 마셔 없앴다. 사람들이 시선이 느껴지니 다른 짓 하기가 좀 그래서였다.
커피를 음미하는 표정을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힐끗힐끗 던지는 센스까지 동원하면서 발을 교대로 풍차돌려꼬기 하는 여유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기분도 한결 좋아졌고.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막 일어서는데 바리스타가 다른 원두라면서 커다란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유명 영화배우와 세련된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부러운 시선. 연거푸 세 잔은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manner maketh man]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아까의 순서를 그대로 반복했다.
잠시 후 바리스트가 또 다른 커피를 내왔는데, 그때부터는 사약을 받아 마시는 기분이었다.
네 잔 째 커피를 들이켜는데 갑자기 체한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살짝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복부가 영토확장을 하듯이 부풀어 올랐다. 커피에 이스트를 집어넣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더니 어지럽고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방음도 안 되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나는 아침식탁까지 전부 게워내고 말았다. '우웩, 쿠웩!'
변기에 머리를 박고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눈물 콧물을 세척하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문을 열고 나오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나를 향하고 있었다. 괴성이 들렸을까. 일단 모르는 걸로.
나는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점잖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사람들이 시선을 거두어들일 때쯤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속도 모르고 바리스타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주전자와 커피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오는 게 아닌가.
"선생님, 이게 마지막 잔이에요."
사람들이 시선이 다시 집중되었다.
'너, 나 죽이려고 그러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와우, 또 주세요."
"호호호. 이번 커피는 최근 들어온 원두 중에 가장 비싼 거예요. 제가 직접 내려드리려고요."
바리스타가 수북이 쌓은 원두 가루위로 뜨거운 물을 부었는데 커피가 웃고 있는 거 있지.
'그래, 너 죽고 나 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