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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Oct 20. 2024

할머니와 1회용 비닐장갑

mayol@골계전 32. 안 하느니만 못한 봉사

춥다.

머플러라도 두르고 나갔어야 했는데, 인왕산을 넘어 광화문 네거리까지 밀려온 바람이 차가웠다.

곧 살얼음이 얼면 리어카나 손수레를 끌고 박스를 찾아 헤매는 노인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지겠지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신사동에 단아한 건물을 임대해 직원들과 함께 페인트 칠을 하고 벽지도 발랐던 때였다.

투자자들이 생기고 일도 제법 잘 진행이 되어 더 큰 일을 도모해도 좋은 시기였다.

지금도 클래식 음악 해설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계신 모 대학의 학장님도 주주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당시 그분의 따님이 송파구의 한 복지시설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내게 봉사할 기회를 주겠다면서 찾아왔었다.

송파구에 사시는 80대 중반이 넘으신 두 분의 할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할아버지 한 분을 포함한 독거노인 세 가정에 매달 두어 차례 쌀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흔쾌히 수락을 하고 매월 5-10kg 내외의 쌀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한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은 오롯이 혼자 지내는 독거노인이었고 할머니 한 분은 몸이 불편한 아들과 둘이 살고 있었다.

몇 번 방문을 하고 안면이 익자 내가 올 날짜를 계산하고 계셨다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처음 몇 번은 의례적인 인사만 나누었는데, 도중에 봉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아 독거노인들이 실망하는 일이 잦아 생긴 현상이라는 복지사의 말이었다.

세 분 모두 지하 단칸방에서 지냈다. 어둑한 방 안 분위기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려질 거라 생각한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할머니 한 분은 밥을 먹고 가라며 때마다 나를 잡으셨다.

조심스럽고 창피한 이야기지만, 내 마음과는 전혀 딴판으로, 거의 24시간 이불이 펼쳐져 있는 손바닥만 한 단칸방 한편에는 정돈되지 않은 작은 개수대와 가스불에 며칠 동안 데웠다가 식었다가를 반복한 찌개 냄새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에고, 우리 이쁜 아가 왔네. 배고프지. 이 할미가 맛있는 밥 해 줄 테니 잠깐 앉아 기다려봐."

"에고, 할머니. 제가 쌀 갖다 드리면서 그걸 먹어버리면 뭐가 돼요. 절대 못 먹습니다."

"아니, 그럼 이 할미가 섭하제."

"할머니, 이러시면 저 못 와요. 복지사님께서도 어르신들에게서 받아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할머니는 개수대를 어정쩡하게 짚고 서서는 복잡한 미소를 지으셨다.

'제발, 먹고 가라'는 성화에 딱 한 번 얻어먹은 기억이다.

일하다가 낮 시간에 방문하는 거라 긴 대화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건강상태는 확인해야 했다.

어른들 몸에 이상징후라도 느껴지면 복지 담당자에게 알려주는 일 역시 중요한 미션이기 때문이었다.


"할머니, 차주에 또 봬요. 어디 아프시면 꼭 말씀해 주시고요."

"그려. 운전 조심히 하고 다녀. 끼니 거르지 말고. 바쁜데 어여 가봐. 꼭 또 오고."


내 끼니를 염려해 주시는 그분들의 마음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그렇게 1년 동안 거르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1년이 지나자 회사가 여러모로 복잡한 일들에 엮이기 시작하고 마음이 쓰여 복지관을 찾았다.


"선생님, 제가 일이 바빠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다.


"내가 이 일 시작할 때 말씀드렸죠. 앞으로는 함부로 봉사한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저분들은 매달 마욜님 오기만 기다리며 사시는데 고작 1년 하고 그만둔다는 소리 들으면 심정이 어떠시겠어요. 사실날도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인데요."


내가 다녀가면 복지관에서 일종의 '감사'를 진행했다. 봉사자들이 좋지 않은 언행을 했는지 확인하는 절차였다.

다행히 세 분 모두 나를 흡족해하셨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했으니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1년 동안 욕을 쌓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고 마음도 서글퍼졌다.


이듬해 겨울, 경찰공무원으로 일하던 두알친구가 경찰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동네를 지나던 중이었다. 문정동 진입로 왕복 4차선 도로에는 차들이 꽉 들어찬 데다가 빙판길에 눈까지 쌓인통에 차량 진행이 쉽지 않았다.

건너편 내리막 차선에는 할머니 한 분이 폐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잡고 발을 내딛지 못하고 계셨다.

불편한 아들과 살고 있던 할머니였다.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복지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분이었다. 다른 독거노인에 비해 생활비가 두 배로 들어갈 게 뻔했다. 폐지라도 주워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수밖에.

내 눈에 들어온 건 쇠로 만든 차가운 리어카 손잡이를 부여잡고 있는 할머니의 두 손이었다.

할머니의 손에는 투명한 1회용 비닐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길이 얼어붙고 고드름이 처마 끝에 매달릴 정도로 추웠던 1월에 비닐장갑이라니.

나는 차를 진행하지 못하고 조수석에 던져놓았던 가죽장갑을 쥐었다가 놨다가를 하염없이 반복했다.

뒤에 밀려있는 자동차들의 경적소리가 전쟁이라도 난 듯이 울렸고 할머니의 리어카에 막혀있는 건너편 차선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힘만으로는 주체하기 힘든 살얼음판 같은 세상이었다.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눈물만 흘렸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장면을 잊지 못한다.

용기 내서 장갑이라도 끼워 드리고 왔어야 했나 하는 후회도 한다.

덮어지지 않을 나의 허물이기도 하다.

지금쯤은 세 분 모두 편한 곳으로 가 계시겠지.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날이 차면 내 주머니에 두 주먹만 가득 찬다.'던 어느 시인의 말이 떠 오르는 헛헛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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