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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요 Aug 25. 2021

노랑이와 할매

  화창한 오후입니다. 햇살이 온 세상을 비춰줍니다. 그러나 이곳은 온통 깜깜합니다. 갑자기 세차게 밀려오는 헹군 물 때문에 한바탕 구정물 파도가 일렁입니다. 여기는 햇살의 손길이 닿지 않는 수챗구멍입니다. 샴푸 헹군 물도 이윽고 구정물과 섞이게 됩니다. 헹군 물속에 무언가가 섞여서 흘려 내려옵니다.

  "에잇, 퉤퉤. 대체 여기가 어디람?"

  툴툴대는 소리가 수챗구멍 안을 웅웅 울립니다.

  "뭐야? 냄새나고 더러운 여긴 대체 어디지? 으앙, 난 몰라."

  울음소리에 가늘고 구불거리는 그림자가 움직입니다.

  "넌 누구냐?"

  두려움을 느낀 노랑이는 최대한 굵은 목소리로 물어봅니다.

  "난 흰 머리카락이야. 그러는 넌 누구냐? 보아하니 너도 머리카락은 머리카락 같은데…"

  "휴…살았다. 만나서 반가…갑지는 않지만, 뭐. 난 검은 머리카락. 아니 지금은 노랑 머리카락이야."

  "노랑 머리카락?"

  "응 그냥 노랑이라고 불러. 그런데 여긴 어디니?"

  "예끼! 이놈. 어른도 몰라보고 어디서 반말이냐? 이 배은망덕한 놈. 넌, 위아래도 없어?"

  깜짝 놀란 노랑이는 하마터면 구정물을 마실 뻔했습니다.

  "아니 무슨 머리카락 처지에 위아래를 따져? 몇 살인데 그래요? 쳇"

  순간 노랑이는 아차! 싶습니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거든요. 검은 머리카락에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흰 머리카락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아무리 머리카락이라도 그렇지. 앞으론 존댓말 써!"

  노랑이는 마지못해 콧소리로 '네'라고 대답합니다.

  "그나저나 넌 여기에 어떻게 왔냐? 검은 머리카락이라면 아직 한창때인데……그런데 온몸이 노란색으로 뒤덮여있는데 안 답답하냐? 온통 노란색이라 흰 머리카락인지 검은 머리카락인지 헷갈렸잖아."

  "말도 마세요. 저의 주인은요 1년 365일 머리카락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아요. 염색했다가 탈색했다가 심심하면 뽀글뽀글 파마. 걸핏하면 쫙쫙 생머리로 펴고. 그 바람에 저와 제 친구들은 지쳤다고요. 드라이하다가 반은 끊겼는데 오늘 머리 감다 완전히 끊겨 나왔어요."

  노랑이는 숨도 안 쉬고 순식간에 그동안의 일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보면 오랜 시간이 지난 일 같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의 일인데도 말이죠.

  "변덕스러운 여자 주인이었던 모양이지?"

  "아뇨 남자였어요."

  "요즘은 남자가 뽀글뽀글 파마도 하나?"

  노랑이는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요즘 유행을 모르시는구나. 요즘 남자들 아줌마처럼 뽀글뽀글 파마가 유행이에요. 한번은 길을 가는데 어떤 여학생이 잘못해서 제 주인 팔을 치고 갔는데, 뒷모습만 보고는 아줌마 죄송하다고 그러더라고요."

  흰 머리카락도 이제야 같이 웃기 시작합니다. 노랑이의 깜깜했던 주위가 차차 밝아집니다.

  "유별난 주인을 만났나 봐. 노랑이 너는 젊은 나이에 안됐다. 아직 세상 구경도 덜 했을 텐데 말이야."

  흰 머리카락은 아련한 추억에 잠깁니다. 그러고 보면 세월이란 게 눈 깜짝할 사이입니다.

  "흰 머리카락님은 이곳에 어떻게 오셨어요?"

  "흰 머리카락님은 무슨. 그냥 내 주인은 할머니였으니까 그냥 할매라고 불러. 나야 뭐 할매가 늙으니까 덩달아 나도 늙고. 팔다리가 힘을 못 쓰더니 점점 머리카락까지 영 힘이 없어지는 거야. 그렇게 위태롭게 보내다가 할매가 죽기 이틀 전에 며느리보고 머리를 감겨 달라고 하더라고. 그때 힘 좋은 며느리 손에 머리카락들끼리 엉키다가 쏙 빠져버리게 됐지."

  노랑이는 할매가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역시 어른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 같습니다. 할매가 다시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내 주인 할매는 행상을 했어. 농사를 지어서 이것저것 시장에 내다 팔았지. 그때 나는 세상 구경을 참 많이 했지."

  "저도 세상 구경 조금 해 봤어요. 주인이 이곳저곳 돌아다니길 좋아해서."

  노랑이가 할매 이야기 중에 끼어들었습니다.

  "넌 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그리고 남의 이야기 할 때 끝까지 들어주다가 끝나면 이야기해야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죄송해요. 저의 주인이 남이 말할 때 끼어들기 선수라서 어느새 저도 보고 배웠나 봐요."

  노랑이는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습니다.

  "앞으론 조심하도록 해. 그런데 어디까지 했지? 까먹었네."

  "시장에서 세상 구경 많이 했다고요."

  "아…시장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봤어. 시장은 사람과 물건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이야. 언제나 왁자지껄하지. 세상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 그중에서도 몸이 불편한 사람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아."

  노랑이는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매의 이야기는 실타래처럼 계속 풀어져 나왔습니다.

  "하루는 찰랑찰랑 탐스러운 머릿결을 가진 아가씨가 완두콩을 사러 왔었지. 내 생전에 그렇게 아름다운 머릿결을 본 건 처음이었어. 머릿결에 가려서 휠체어를 타고 안타고는 아무 상관 없었어. 할매가 가는 귀가 먹어서 한 되 주랴? 두 되 주랴? 귀찮게 거듭 물어봐도 계속 웃으면서 두 되라고 대답했어."

  노랑이는 자기 주인이 몹시 부끄러워졌습니다. 노랑이 주인은 말끝마다 '짜증 나'를 달고 살 거든요. 할매는 잠시 쉬었다가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난 그 아가씨에게서 빛을 보았어. 웃을 때마다 빛은 더 강렬해졌어. 아가씨를 보고 있노라니 나에게도 웃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어."

노랑이의 마음이 뜨겁게 차오릅니다.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날 오후엔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겨 정수리에 올려 묶은 아줌마가 팥을 사러 왔어. 오자마자 팥이 색깔이 왜 이렇게 흐리멍덩하냐는 둥 벌레 먹은 팥투성이라고 투덜대다가 실수로 찬 발길질에 팥이랑 완두콩이 죄다 엎어진 거야. 호랑이 할매의 불같은 성격이 아줌마의 머리카락을 한 웅큼 뽑아놨지. 그래서 잘난 척하던 아줌마의 정수리 올림머리가 다 풀어졌지. 사실 그래도 싸긴 쌌어. 십 분째 이러쿵저러쿵 불평만 늘어봐서 오는 손님도 몇 명 쫓아버렸거든."

  노랑이는 정수리 올림머리 아줌마를 생각해 봅니다. 머릿결 아가씨 곁에는 휠체어 친구가 있어서 든든하지만, 정수리 올림머리 아줌마 곁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는 아줌마가 정수리에는 머리를 안 묶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묶을 때마다 머리카락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할매의 실감 나는 이야기로 아줌마의 머리 모양이 머릿속에 그려지고도 남았습니다. 노랑이가 낯을 가리는 탓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할매가 처음에는 떨떠름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만난 것이 노랑이 인생의 영광이라고까지 생각됩니다. 비록 수챗구멍에 만난 사이지만요. 만남에 있어서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노랑이는 그동안 주인 머릿결 속에서 또래 친구 머리카락들하고만 지내니까 버릇도 없고 화나면 짜증 내는 게 당연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그 즉시 짜증으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갑자기 헹군 물이 또 흘러 내려옵니다.

  "자, 이제 또 헤어질 시간이구나."

  할매는 미리 알았다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할매, 그럼 우린 또 언제 만나나요?"

  할매는 씨익 웃어 보입니다.

  "눈으로 나를 기억하지 말고 마음으로 날 기억하렴. 그럼 바로 나를 만날 거야."

해가 노을 속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온종일 밭에서 김을 맸던 김씨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아저씨의 남방에 살랑 바람이 간지럼을 피워줍니다. 종일 일한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합니다. 집 근처에서 동네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자네 오늘도 욕봤구먼. 아이고 팔 다리 어깨가 아파서 이제 김도 못 매겠어.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늙을수록 몸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여. 그런디 자네 무슨 좋을 일 있남? 왜 이리 싱글벙글이여?"

  여전히 미소가 입에 걸린 아저씨는

  "늘 좋은 일뿐이죠. 우선, 제가 이렇게 살아 숨 쉴 수 있는 게 감사하고 건강 주셔서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잖아요. 힘들면 잠시 쉴 수도 있고 목마르면 물도 마실 수 있고 배고프면 실컷 밥도 먹고. 이렇게 집에 들어가는 길에 반가운 어르신도 뵐 수 있고 집에 가면 저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고. 늘 기쁘게 사니 좋은 마음만 생겨서요."

어르신은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맞아! 그래서 자네는 몸이 튼튼하고 신수가 훤했구먼!"

  김씨 아저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운지 인사만 꾸벅하고 집으로 향합니다.

  "어험, 아빠 왔다. 귀여운 내 강아지들 잘 있었나?"

귀여운 두 남매는 아빠의 넓은 어깨로 달려와 와락 껴안습니다. 김씨 아저씨의 미소가 얼굴에서부터 온몸 구석구석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빠가 땀나서 무척 더우니까 등목 좀 해야겠다. 우리 강아지들이 아빠 등에 물 한 바가지씩만 뿌려줘."

  아이들이 뿌려주는 시원한 물로 등목하는 김씨 아저씨는 콧노래를 부릅니다. 한참 흥얼거리던 아저씨가 갑자기 소리칩니다.

  "어랏, 머리카락이 또 빠졌네. 이젠 숱도 얼마 없는데 이런. 허허허."

  김씨 아저씨 머리카락이 헹군 물을 따라 수챗구멍으로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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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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