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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요 Sep 05. 2021

우린 감의 장난

  가을 햇살에 눈이 부신 한 낮입니다. 고추잠자리가 앞마당 감나무 꼭대기 주위를 빙글뱅글 돌고 있습니다. 들녘은 한창 가을걷이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그래서 집에는 아무도 없고 자목이 홀로 집을 보고 있습니다. 오빠는 오후수업까지 하기 때문에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려면 멀었습니다. 오늘도 혼자 놀아야 합니다.

  자목이는 단짝 복실이의 쇠 목걸이를 풀어주고 뒷동산까지 뛰어 올라 갑니다. 산소에 올라간 복실이를 잡아보려고 따라 올라갔다가 문득 미옥이 언니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산소에 올라가면 꿈에 귀신이 나와서, "네 이놈! 내 몸 왜 밟아?" 그런대.'

  자목이는 깜짝 놀라 뒤도 안 돌아보고 부리나케 집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는 대야에 물을 가득 부어 비누로 손을 싹싹 닦습니다. 엄마는

  "복실이랑 놀고서 손 안 닦으면 병균 옮아서 병 걸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손에서 나는 비누 향내가 코끝을 스치는 게 참 좋습니다.


  방에 들어와서 공기놀이를 합니다. 자목이는 공기를 못해서 친구들이 항상 깍두기로 시켜 줍니다. 깍두기는 정말 싫습니다. 어느 편에 소속 되고 싶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것 같아서 재미없습니다. 이쪽 편에서 잘하다가 저쪽 편에 가서 못하면 괜히 애들한테 듣기 싫은 소리나 듣고. 공기는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닌데…… 그래서 요즘은 집에서 혼자 공기 연습을 한답니다. 정말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젠 제법 손에 익어서 어지간하면 떨어뜨리지도 않고, 꺾기는 네 개도 잡고, 다섯 개도 잡곤 한답니다. 계속 공기에 열중하다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납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라곤 온통 반찬뿐입니다. 요즘 바심을 해서 콤바인 운전하시는 아저씨 새참을 드려야 합니다. 특별한 날에만 먹는 고등어자반이랑 돼지불고기가 있습니다. 손으로 몇 점 집어먹었더니 좀 느끼합니다. 냉장고 야채실에 사과가 있긴 한데 엄마가

   '내일 새참에 아저씨 입가심으로 드릴거야. 손대지 마!'

   그래서 그냥 그림의 떡이 되어 버렸습니다.

   "에잇, 이게 뭐야? 우리 집은 먹을 것도 없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아까 그 고추잠자리인지 아직도 감나무 위를 돌고 있습니다. 감나무에는 발그스름한 홍시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자목이는 홍시보다  단감이 좋습니다. 홍시는 너무 물러서 먹을 때 손에 다 묻어서 별로입니다. 저번에는 먹다가 흘려서 옷에 물들었는데 아무리 빨아도 잘 지지가 않았습니다. 새 옷이었는데 엄마한테 어찌나 꾸지람을 들었는지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핑 고입니다.

  땡감의 껍데기를 벗겨서 바구니에 널어 가을 햇볕에 말리면 곶감이 되는데, 겨울에 할머니와 뜨듯한 아랫목에서 입이 심심할 때 먹으면 그야말로 꿀맛입니다. 그럴 때 할머니는 어김없이 옛날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습니다.

   "이 할미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시집을 왔는디, 그때는 뭐가 뭔지 몰랐다구. 지금 나이로 치면 중핵교 댕길 나이 아니냐? 아직 애기지. 암, 그렇구 말구."

  할머니 이야기는 꿀을 발라 놓은 것 같습니다. 귀 기울여 듣다보면 자목이도 모르게 침이 꼴까닥 넘어 갑니다.

   "워디까지 했드라? 잉 시집을 왔는디, 허구 헌 날을 농사일만 하는 겨. 자목이 너두 그때 할미 도와 준다구 리어카 뒤에서 밀어 봤을 때 워땠냐? 힘들었쟈? 그려, 힘을 쓰니까 허기가 지드라구. 지금은 주전불이 할 것두 많은디, 그땐 먹을 게 없었다구. 그래 마당을 보니 곶감을 말리고 있대. 첨에는 한 개만 먹어야지 했는디, 그게 워찌나 물렁물렁한 게 맛나던지 정신 못 차리고 먹어 제꼈는디, 먹고 나니 호랭이 시어머니가 생각나는 겨. 혼비백산으로 빨리 감 껍데기를 베껴서 곶감을 만들었지. 며칠이 지나니께 딴 건 얼추 비슷한디 곶감 겉이 허얗게 떠야 되는디 이게 당최 안 생기는겨. 겁은 나구 해서 일단 눈가리구 아웅 한다구 밀가루를 발라 버렸지 뭐여. 곶감이 삭혀져 흰 색깔로 변하는 건디, 밀가루를 뿌렸으니……그때 시어머니가 동네방네에다 소문 내구 댕겨서 이 할민 웃음거리가 되구, 저 건넛마을에서는 나를 곶감 며느리라구 부르기까지 했다는 거 아니것냐? 허허허."

  또 이러한 구수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요즘은 어둑어둑한 밤이 되서야 겨우 얼굴을 뵐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셔서 피곤하기 때문에 귀찮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어제 앞집에 사는 복구가 단감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면서 우리 집에 놀러 왔었습니다. 한 입만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언니 체면에 왠지 쑥스러워서 말은 못하고 언젠가 처럼

  '언니~ 이거 다 먹어.'

  하며 은근히 한 입 주기를 기대 했지만, 어느새 감은 꼭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목이는 복구가 이것저것 물어 봐도 대꾸도 시원찮게 해주고

  "나 숙제해야 돼서 그만 갈래."

  라고 말하고 그냥 방으로 들어 와 버렸습니다. 얼른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할머니, 나 단감 먹고 싶어. 우리 집은 왜 홍시만 심고 사탕 감은 안 심었어?"

  입을 주욱 내밀며 볼멘소리로 말하는데, 할머니는 답답하게 빙그레 웃기만 하십니다.

  "걱정 말어. 이 할미가 땡감으로 단감을 만들어 주마. 그럼 되는 거쟤?"

  "할머니가 무슨 해리포터도 아닌데, 어떻게 물렁물렁한 홍시를 딱딱한 사탕 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지? 단감은 따놓고 오래되면 물러져서 홍시 비슷하게 만들 수 는 있는데. 비록 맛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머리만 갸우뚱거려집니다. 할머니는 먼저 뒤란에서 항아리 하나를 가져오십니다. 그리고 항아리 속을 깨끗한 물로 부시더니, 신문지로 땡감  먼지를 닦고 젓가락으로 정 가운데에 구멍을 뚫습니다. 이게 침을 주는 거래요. 똥침 말고 젓가락 침. 그 다음엔 할아버지 소주를 감위에 바르기 시작합니다.

   "할머니 뭐 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정말 사탕 감이 되는 거야?"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태껏 자목이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자목아, 이렇게 만들어 놨으니께 한 사흘 지나면 달달하게 우려질겨. 그러면 하루에 딱 한 개씩만 먹어야지. 아님 탈난다. 알아 듣것냐?"

  하시며 항아리를 사랑방 아랫목에 놓았습니다. 머릿속엔 온통 땡감이 어떻게 단감으로 변하는지. TV에 나오는 슈퍼맨처럼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면 변신하는 것도 아닐 텐데. 이 세상은 참 궁금한 것 투성 입니다. 꾸욱 참고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사흘을 말이죠.

  부지런한 수탉이 아침을 알리는 오늘은 땡감이 사탕 감으로 변신 하는 날입니다. 성큼성큼 사랑방으로 다가섭니다. 잔뜩 기대를 하고 항아리 뚜껑을 열어봅니다. 소주 냄새가 코를 찌를 줄 알았는데 거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정말 땡감이 사탕 감으로 변했을까? 설탕을 발랐다면 모를까? 소주는 쓰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할머니를 굳게 믿고 감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어 봅니다. 땡감을 씹을 때 느껴지는 떫은맛은 어디로 사라지고 단감의 달큰한 맛만 남았습니다. 정말 신기한 노릇입니다.

    "할머니! 정말 단감이 돼 버렸네?"

   할머니 주름살이 오그라졌다 펴졌다 합니다.

   "이것이 우린 감이라는 거여. 소주에 우려낸 감. 알아듣남? 우리 자목이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땡감 일 때 떫은맛처럼 모난 마음은 버리고, 달짝지근하게 변해버린 우린 감 마냥 넓디넓은 마음을 가져야 헌다.”

  할머니 말씀에 가슴이 꽉 차 오릅니다.

   "너무 맛있다. 그런데 딱 한 개 가지고는 양이 안 차!"

  할머니가 뒤돌아 볼 때, 양쪽 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휘파람을 불며 밖으로 나왔습니다. 단감을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존경하고 싶습니다. 입안에 감도는 이 달콤함을 오래오래 느끼고 싶습니다. 어느새 주머니는 홀쭉해져 버렸습니다.

  

  3교시 수업시간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들으려고 하는데 배가 슬슬 아프기 시작합니다. 어제부터 똥을 못 눴는데. 누군가 똥 참는 것은 약이 된다고 하던데,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몸을 베베 꼬면서

   "선생님 화장실 좀……."

  목소리가 점점 줄어듭니다. 친구들은 자목이의 모양새가 우스운지 교실이 한바탕  뒤집어 집니다. 복도에서는 좌측통행이라는 푯말이 있지만, 눈에 들어 올 리 없습니다. 냅다 가로 질려서 화장실로 향합니다. 모든 기운을 배에 모아서 힘을 주어도 도무지 나올 기미는 없고, 등에서 식은땀만 주르륵 흘려 내립니다. 전에는 아무리 안 나온다 하더라도 오 분 안이면 결론이 났는데, 벌써 십분 째입니다. 좀 있으면 쉬는 시간이 될 텐데 그때까지 화장실에서 안 나오면 친구들의 놀릴 감이 되어 버릴게 뻔합니다. 더 이상 앉아 있자니 다리가 저려서 움직이지 못하겠습니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친구들은

    "아, 똥 냄새~"

  코를 막고 손 부채질하느라 난리가 났습니다. 선생님은 조용히 자목이 곁에 다가오시더니

   "괜찮니? 어디 배탈 난 거야?"

  선생님의 부드러운 말투에 자목이는 아침부터   개를 내리 먹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계시던 선생님 얼굴에 어느새 함박웃음이 가득합니다. 선생님은 자목이 손을 꼬옥 잡고 양호실로 데리고 갑니다. 양호 선생님과 뭐가 그리 우스운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시더니 알약 하나를 주십니다.

   "자목아, 하루에 감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감은 변을 딱딱하게 만드는 힘이 있거든."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습니다. 이제 단감이라면 지긋지긋 합니다.

  어제로 우리 바심이 끝나서 곳간 가득 쌀가마가 쌓여 있습니다. 이제 당분간은 논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부터 할머니는 다리 쭉 뻗고 주무시겠네요.

   "학교 다녀왔습니다."

  마당을 쓸던 엄마는 싸리 빗자루를 들고 달려옵니다.

   "야, 유자목! 너 누가 세 개나 꺼내 먹으래? 그렇게 먹으면 변비 걸리는 거 몰라?"

  자목이는 급히 화장실로 대피하였습니다. 아까부터 뱃속의 감들이 신호를 보내고 있지 뭐예요.


 '움하하하. 우린, 우린 감이다. 그러 길래 하나만 먹으랬지? 누가 우릴 세 개나 먹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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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사조 2004년 신인상 당선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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