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과수원은 가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사과는 빨갛게, 감은 주황빛으로, 배는 노랗게 각자의 가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습니다. 긴 여행을 떠날 채비 중인 여름은 마지막 햇살을 듬뿍 뿜어주며 내년에 만나기로 작별인사를 합니다.
과수원 정중앙에 우뚝 서 있는 사과나무의 아삭이도 파란 옷을 벗고 빨간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올해도 혜경이 아줌마네 과수원 사과 농사는 풍년인 것 같습니다. 하늘 향해 활짝 펼친 나뭇가지 사이로 사과열매들이 옹기종이 살고 있습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가장 먼저 빨갛게 익은 친구들부터 혜경이 아줌마 눈에 들어 선택 받게 되겠죠. 당당히 뽑힌 사과들은 깨끗한 상자에 담겨져 여러 군데로 팔려나가게 될 것입니다.
아삭이는 달콤한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사과를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삭이는 맛있는 사과가 돼서 사람들에게 달콤새콤함을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기분이 좋으니 마음까지 설렙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북쪽 하늘이 심상치 않습니다. 북쪽에서부터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봐, 모두들 정신 바싹 차려! 가지를 꽉 잡고 있으라고.”
아까부터 바람이 좀 세차다 싶었는데, 이제는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이 가지들까지 흔들리고 나무뿌리마저 휘청댑니다.
“감나무 아저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놀란 사과나무가 옆에 있던 감나무에게 물어봅니다. 감나무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감나무는 이 자리에서만 50년을 살았으니까요.
“글쎄, 저도 50년 만에 이런 거센 태풍은 처음이에요. 온 몸이 뻐근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맨 꼭대기 가지부터 뿌리 끝까지 와지끈~ 하고 부러질 거 같이 아파요.”
어느새 비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비와 바람이 만나니 더욱 강해졌습니다. 아삭이는 사과나무 엄마를 꼭 붙듭니다. 사과나무 엄마는 아삭이에게만 힘을 집중 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가족 사과들에게도 힘을 똑같이 나눠줘야 합니다. 아삭이는 있는 힘껏 사과나무 엄마에게 매달립니다. 사과 열매들이 하나 둘 씩 떨어집니다. 아삭이 옆에 푸석이도 달랑달랑 거립니다.
“푸석아, 절대 포기하면 안 돼. 좀 더 힘을 내!”
“됐어. 나는 지금 떨어지나 나중에 떨어지나 어차피 뽑히지도 못할 거야. 난 너처럼 1등급 사과도 아니잖아.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는지 모르겠어. 정말 짜증나.”
푸석이는 툴툴거리다가 그만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대굴대굴 굴러다가 시궁창 속으로 퐁당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삭이도 더 이상 남은 힘이 없습니다. 이러다가 곧 끝날 것 같습니다. 더는 버틸 힘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조금만 더. 이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참아보자. 나는 할 수 있어.’
아삭이의 기나긴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오롯이 혼자 싸워 이겨야만 단단해지는 과정입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이 희망이 사라졌을 그 때! 거짓말처럼 비바람이 힘을 잃고 쌩쌩에서 슝슝으로, 슝슝에서 실실로, 그리고 점차 살랑바람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삭이는 사과나무에 당당히 매달려 있습니다. 아삭이에게서 빗물인지 눈물인지 하염없는 흘러내립니다. 아삭이는 이렇게 긴 시간을 버텨냈습니다. 사과나무 엄마도 살아남은 아삭이가 몹시 대견해서 아삭이를 위해 남은 힘을 힘껏 실어줍니다.
“어머나, 여보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50년 만에 찾아온 무시무시한 태풍에도 살아남은 사과가 있네. 장하다, 장해. 이 귀한 사과는 팔긴 너무 아까워. 우리 아들 먹어야겠어.”
혜경이 아줌마는 아삭이를 또옥 땁니다. 아삭이는 혜경이 아줌마의 품에 안겨 여행을 떠납니다.
“진영아, 이거 먹어봐. 태풍을 이긴 승리의 사과야. 이 귀한 사과를 먹으면 진영이가 더욱 건강해 질거야.”
“승리? 그게 뭐야? 좋은 거야? 우와, 이 사과 맛있다. 아삭아삭 꿀맛이야.”
아삭이의 꿈은 진영이의 목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갑니다. 아삭이의 달콤새콤한 꿈이 서서히 여물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