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근아 Dec 30. 2023

야채, 사람, 야채, 사람

메이페이퍼 ㅣ 나는 호주에서 5살이다 ㅣ 06

라테 작은 사이즈, 주문할게요.

우유는 두유로 주시고,

원래 양 보다 30프로 정도 적게 주세요.

설탕은 한 스푼만 넣어주시고.


식사는 빅 브레키(주1)로 주세요..

계란은 노른자를 모두 익혀주시고,

베이컨은 너무 바삭하지 않게 익혀 주세요.

빵은 조금만 토스트 해주시고,

버터는 따로 주시고요,

당근은 빼주시고,

대신에 버섯을 좀 더 주시겠어요?


내 상상으로 주문서를 만들어본 것이다.

이런 주문을 한국 카페에서 주문을 한다면, 웬 진상? 이럴 것이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이렇게 복잡한 주문을 한다 해도 모두 오케이다. 실제로 내가 이런 식으로 주문을 해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주문을 자세하게 들어본 적도 없어서 정확하게 어떠한 주문을 하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카페에 주문하려고 줄을 서 있으면, 각자의 요구사항을 얘기하며 카운터 앞에서 랩을 하듯, 끊임없는 주문을 쏟아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이는 5명의 커피 주문을 하면서 모두 다르게 맞춤 주문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속으로,

‘해도 해도 너무하네.’ 싶다가도

그 진상 같고 개인주의 같은 주문을

친절하게 다 기록하는 카페직원을 보며,

이런 것도 호주의 문화구나 싶었다.


개개인의 요구가 존중되는 문화.

개개인의 주장이 당당해지는 문화.


그럼 나의 주문은? 나는 간단명료하다. “ 아이스라테 주세요.” 10초 만에 결제까지 속전속결이다. 사실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이 스스로 민망하기도 하다. 나만 다른 세상에서 온 듯, 가끔은 소외감을 느낀다. 심지어 아무도 안 시키는 아이스 음료를 주문하니, 나는 영락없는 한국사람이다.  


이젠, 나도 '카페 단골손님'이 되었다. 나를 맞이하는 직원들은 모두 내 얼굴을 보면 나에게 먼저 물어본다. “아이스라테?”  


뜬금없이, 다른 이들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았다. 나는 아이스라테를 주문하는 한국여자다.




그럼, 이런 호주의 문화_ 제각각 주문을 달리하고, 그 또한 그대로 받아지는 문화는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한참을 이 질문에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가, 수채화 아트 수업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개개인 모두의 개성이 강력해서, 

그들을 대체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이들이 당당한 것이다.  


말동무가 필요하신 밥 할아버지는 10분이 넘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친절하게 나에게 보여주시며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얘기해 주셨다. 부인을 잃었을 때, 딸이 등록해 줘서 그림을 시작했다 하셨다. 그분의 작품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만의 스타일이 있었고, 그를 딱 닮아 있었다. 엔지니어로 평생을 일하셨다는 그분의 그림은 깔끔하게 라인이 정리된 호주의 빌딩을 닮아 있었다.  


거침없이 다가오는 로라는 수채화를 처음 배워서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자주 강사와 수다를 떠느라 한 시간을 흘려보내 버리곤 했다. 매주 그들의 토론은 점점 더 깊어지고 심오해졌다. 수채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갔다. 그들의 토론은 서로의 의견이 맞닿다가 충돌하다가 호탕한 웃음과 소리 없는 웃음이 섞이기도 했다. 멀리 앉아 있음에도, 그녀들의 말들은 나를 집중시켰다. 호주인들의 수준 높은 토론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로라의 그림은 휘리릭 완성되었다. 그녀의 그림은 과감했다.


학생들 앞에서 춤을 추는 강사 데이비드는 2시간 내내 음악이야기만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의 작품을 보며 칭찬을 하고 그들의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며 간단한 칭찬을 추가하는 것으로 수업을 마무리지었다.


무슨 수채화 수업이 이래? 배우는 게 없네?라는 생각은 2주 차에 나의 착각이었음을 바로 깨달았다. 1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모두 각자의 그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이건 사실 충격이었다. 아무것도 가르치는 것이 없는데, 학생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배우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꾸준하게,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스타일을 계속 칭찬해 준 것이었다.  


나의 그림을 봤다. 색은 옅었지만, 무한의 색을 담고 있었고, 내 그림은 조심스럽고 느렸다. 내 그림 또한 나를 닮아 있었다, 다른 이들의 그림과는 확연히 달랐다. 더 자세히 비교해 보니, 내 그림은 한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30년 동안 성장한 한국의 그림이었다. 호주의 미술 문화를 느끼고 싶어서 아트 수업을 신청했는데, 나는 내 그림에서 한국을 발견했다.


나는

완성되지 않은 그림에 더 매력을 느끼고,

여백을 사랑하는,

수채화도 한국화처럼 그리는

한국인 아티스트였다. 




한국에서는 남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면서 나의 자존감, 존재감이 낮아졌었는데, 여기서는 모두가 다르니, 비교할 대상이 사라지니, 그들 속에서 ‘나 자신'을 찾고 존재의 이유도 찾았다. 


야채, 야채, 야채, 야채,

당근, 오이, 버섯, 가지

당근이 버섯을 대체할 수는 없는 거다.

하지만,

당근 빼고, 버섯은 가능하다.


사람, 사람, 사람, 사람

밥, 로라, 근아, 데이비드

밥 할아버지가 근아를 대체할 수는 없는 거다.

또한, 더욱이, 기필코,

근아를 빼고, 밥 할아버지가 대신할 수 없어야 한다.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나'를 찾으니,

내가 

그들과 다름이

확실하게 보였다.


나는 특별주문으로 만들어졌다.

한국화를 전공하고,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인을 전공하고

북디자인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고

호주에 산다.


내가 당당해졌다.


이제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호주가 준 선물, 세 번째는 '한국적인 근아'다.


무궁화 , 예쁠 .

나는 호주에서 무궁화꽃을 피우는 한국인이다. 









(주1) 호주에서는 아침식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breakfast'를 'brekkie'로 줄여서 사용한다.






이전 05화 나는 아기 백조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