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페이퍼 ㅣ 나는 호주에서 5살이다 ㅣ 05
Pass!!!
Pass ??????
“통과!”를 받았으니 기뻐하라고?
1/3의 학생이 낙제했다고?
평균점수가 56점이니,
60점을 넘었다면 아주 잘한 거라고?
내 점수를 보니 Pass. 62점
이게 아주 잘한 거라고?
그럼 내가 천재인 거야?!???
대학원에서 수강했던 리더십 수업이었다. 첫 번째 과제에 대한 성적표를 받았을 때,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어이가 없었고, 그 강사가 이해되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호주의 점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호주는 한국과 채점방식이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100점에서 틀린 수만큼, 부족한 만큼 점수가 깎여서 100점부터 0점으로 내려간다면,
호주에서는 0점부터 채워 100으로 올라간다. 세분화된 조건들이 하나둘씩 충족되는 대로 1점, 2점씩 추가되는 절대평가이다. 그렇게 쌓인 점수를 아래와 같이 나눈다.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Fail 50 이하: Unsatisfactory performance
기본적인 수준의 결과가 나오면 Pass 51-65: An acceptable level of performance
몇 가지 요구사항을 "잘" 이행하면 CR: Credit 66-75: A good performance
차별되는 우수한 능력을 보여주면 DN : Distinction 76-85: A superior performance
높은 수준의 연구를 통해 우수한 작품을 만들고, 과정 전체를 높은 수준으로 이해했다면
HD: High Distinction 85-100: An outstanding performance
처음 대학원을 다닐 때, 호주에서는 CR 70점을 받는 것도 아주 잘하는 것이라 했다. 호주에서의 CR은 한국으로 치자면 B 이상을 의미하고, HD는 A+점 이상이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내 자랑 같지만, 한국인의 저력으로, 난 거의 대부분의 과목에서 DN 혹은 HD를 받았기에 Pass는 충격이었다. CR도 아니고 PASS이라니 충격이었다. 기본만 했다는 의미였다!
나는 당연히 리더십 수업에서도 CR이상은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유를 부리고 아차 하는 순간 F를 받고, 졸업을 못 할 뻔했다. 그래서 Pass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쩔 수 없었다.
평균보다 높잖아.
CR보다 3점이 적을 뿐이잖아.
Pass그룹에서는 리더잖아.
이런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No Problem!
Don’t worry!
이 말은 호주에서 ‘천만에요’ ‘괜찮아요'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는 표현들이다. 영국에서도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같은 말을 들어도 호주 발음으로 들려오는 그들의 말은 진짜 나를 여유롭고 느긋하게 만든다.
상대방에게 계속해서 노 프라블럼, 돈워리를 듣고 있으면 실제로 그냥 모든 게 문제가 되지 않고, 걱정을 자연스럽게 안 하게 된다. 물론, 인사치레의 말임을 알지만, 직역으로 듣다 보면 그렇게 된다. 나도 모르게 세뇌가 되는 기분이다.
리더십 수업. 3-4주 차 되었을 때, 아들이 독감에 걸려 열이 펄펄 났다, 아들을 돌보느라 수업시간에 토론 참여를 못하겠다고 강사에게 양해를 구했고, 그녀는 No Problem!이라 했다. 그 후, 나 또한 아들의 독감에 옮아 10일을 아픈 후, 연이어 코비드까지 걸려 한 달을 진통제로 버티고 있을 때도, 그녀는 Don’t worry!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모두 이해한다고... 계속 그리 말해줬다.
많은 친구들이 리더십 과목은 여유롭다고 과제도 널널하다 했었고, 정보성이 많은 중국친구들의 말을 듣고, 이 과목을 수강하길 잘했다고 안심했었다.
과목 자체의 수업과 과제내용은 너그러운 게 맞았다. 하지만 우리 반을 담당했던 강사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항상 우리에게 상냥하고 모든 상황에 너그러웠던 강사였다. 그녀는 항상 No Problem! Don’t worry!로 우리에게 관대했다.
그래서 난 괜찮을 줄 알았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줄 알았다. 그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말이다. 아파서 수업을 못한 것은 괜찮으나, 그와 관련된 토론 참여 여부가 그대로 내 성적에 포함된 것이다. 내가 괜찮은지 물어봤을 때, 괜찮지 않다고 토론에 불참하면 나에게 불이익이 갈 것이라고 나에게 알려줬어야 했다. '내가 여유를 갖고 얘기하는 것 같지만, 너는 내 말을 여유롭게 듣지 말라'라고 경고해줘야 했다.
이러한 점을 그녀에게 따져봤자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그 많은 학생들을 낙제시킨 것으로 이미 알아차렸다. 그 학생들이 이 과목을 듣기 위해, 1년을 기다려야 하고 졸업을 못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No Problem이었다.
괜찮다.
잘하고 있다.
잘 될 것이다.
모두가 이러한 칭찬에 길들여지고 이렇게 말해주는 이를 ‘착한 사람’이라 한다.
나는 착한 사람이 오히려 신뢰롭지 못하고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여기 호주에서도 알게 되었다.
조금만 더 관심을 둔다면
유학생이었던 날 이해시켰어야 했고
문제없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문제 있다! 고 정직했어야 했다.
이래서 니체가 ‘너희 선량한 사람들은 역겹다!’고 했을까?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학생을 바로 이끌어주는 것이 더 옳은 선생이 아닐까?
나는 그녀의 성격, 교육 스타일까지 탓했었다. 이런 경험을 겪은 후, 나는 그녀의 '괜찮아요'라는 말은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기가 막힌 점수를 학생들에게 준 강사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그 후로, 난 호주에서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고, 이렇게 네네네 괜찮아요로 표현하지만, 마지막엔 공과 사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도 호주 문화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움 속에서도 칼 같은 날카로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나 혼자 착각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여유로움 안에 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문화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여유로움이라는 것이 유연성을 가진 것이라 착각을 했던 것이다.
요즘 내가 느끼는 호주에서의 여유로움은 자유와 책임, 공과 사, 부드러움과 강함, 믿음과 배신, 신뢰와 의심 등 다양한 가치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것은 호주 문화의 핵심이자 특징일 것이다.
호주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며, 동시에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적 가치를 지키려고 한다.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중요시되며, 서로 다른 가치들이 동시에 존중되고 인정받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믿음과 배신, 신뢰와 의심의 가치까지도 미묘한 균형으로 유지되고 있는 호주가 더욱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여러 가치가 어우러진 이 호주의 문화는
나에게 대립되는 의미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성과 포용도
함께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고,
호주에서의 경험들은
호주의 교육 문화와 사회적 특징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나 자신의 시선과 이해를 더 넓게 만들어주었다.
지난 04편에서 언급했던 호주의 여유로움과 이런 새로운 시선과 이해로, 그 리더십 강사가 나에게도 No Problem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준으로 삼는 호주의 점수는 Fail과 Pass로 대부분의 학생을 나누고, 나머지 균형을 추가적인 여유로운 점수를 추가하여,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Fail < Pass) < CD < DN < HD
실패 혹은 기본이 아닌, 남들과 구별되는 높은 점수
(공 / 사) + 여유로움
공과 사를 나누어, 나의 삶을 즐기는 여류로움
(흑 : 백) : 칼라
흑과 백 그리고 그들과 다시 대립하는 칼라의 힘
(A팀 : B팀) + 깍두기
내가 게임을 할 때 좋아하는 깍두기 포지션.
그리고 그녀가 가르쳤던 리더십.
어쩌면, 평범한 학생들에게서 리더가 나오지 않고, 보다 특출 난 몇 명이 리더의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것 일수도.
그럼 나는 리더가 될 자격에서 통과인 걸까. 기본만을 갖춘 걸까. 새로운 질문을 나에게 던진다.
나는 평범함 사회에서 깍두기로 여겨지는 예술분야에서,
나의 삶을 즐기는 여유로움을 갖고,
흑백, 그리고 컬러를 조화롭게 어우리면서,
남들과 구별되는 특출 난 능력을 보여주면서,
난 이 분야의 리더가 될 것이다.
그럼,
나는 진짜로 Pass인 것이다. 통과, 합격인 것이다.
이제 오리들 틈에서 벗어나,
백조가 되어 날아갈 것이다.
우아하게,
화려하게,
훨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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