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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아 Dec 23. 2023

여유다. 이런 게 여유지.

메이페이퍼 ㅣ 나는 호주에서 5살이다 ㅣ 04

Copyright 2023. 정근아 all rights reserved.

어휴 느려.

어휴 답답해.

어휴 도대체 언제.


이건 여유로운 게 아니라 게으른 거 아냐?


처음 호주에 왔을 때, 나는 이랬다.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이 많이 겪는 그 증세다. 하지만, 이제 나도 많이 누그러졌는지, 말랑말랑해졌는지, 아예 포기를 한 건지. 이젠 그러려니 한다.


호주의 ‘여유’ 이면에는 한국사람만 분통 터트리는 성질이 들어있다. 미국이나 유럽을 가도 이 분통은 늘 들끓는다고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잠깐 그 이야기를 하자면,

지난 4월, 이사를 한 후 전기연결을 하는데 무려 6개월이 걸렸다. 문제가 없었다면, 하루면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주소와 미터기 연결이 잘못되었다. 주문서에 우리 집 주소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해결해야 했다. 서로 교신을 주고받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이메일상담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오랜 참을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전기미터기 사진을 보내달라는 답장을 받을 때까지 2주, 다른 사진을 보내라는 데까지 2주, 부동산을 통해 도움을 청하는데 1주. 다시 전기회사가 방문하여 미터기 및 주소 확인 후 업데이트된다고 통보받는데 4주. 이런 분통 터지는 느린 이메일 고객상담. 중간에 전화를 시도했지만 20-30분 대기는 기본이다.


결국 나는 포기하고 다른 전기회사로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똑같은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그나마 실시간 채팅 상담이 가능했지만, 채팅을 시도할 때마다, 상담원은 ‘확인할 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다가, 퇴근시간이 되면 칼같이 사라졌다.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컴퓨터 앞에 앉아 그의 대답을 기다렸었다. 나는 다음 날 또 다른 상담원과 같은 내용을 또 채팅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몇 달을 보내며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답답하고 화나게 하는 호주가 왜 살기 좋은 곳일까?

혹시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호주의 속도가 원래의 속도이고

내가 비정상적인 속도에서 살았던 것일까?

내 체감으로, 호주의 속도는 한국 서울의 0.3배속을 하면 되었다.


며칠 후 하나의 이메일을 받으면서 나의 이런 의문이 해소되었다. 정수기 렌트 설치를 위해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였다. 상담을 마치고, 바로 신청서를 보냈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나의 신청서를 6일이나 보류시켰다. 자신의 근무시간보다 5분이 늦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지금 퇴근하였습니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처리하겠습니다.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 ’ 그 이메일에 쓰인 까만 글자가 불쾌하지 않고, 여유롭게 보였다. 덕분에 나는 그녀의 말 그대로를 믿고, 평화롭게 그녀의 다음 이메일을 기다렸다.




물론 이보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도 호주에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살다 온 나에겐 모든 게 여유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난 내 기준에서 아주아주 느림; 서울보다 0.3 배속의 속도를 선택했다. 그 후로, 나는 재촉하거나, 안달 나거나, 답답해하지 않는다.


호주의 속도에 내가 맞춰졌다.


빨리빨리 신속하게, 정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 날 것처럼 불안했던 나는, 그런 모든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의 자유를 얻어 살고 있다. 어느 순간.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그 순간이 왔다. 어쩌면 지금의 나를 누군가는 답답해할지도 모른다. 근데, 이젠 나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천하태평이어야 호주에서 살 수 있다. 평화롭게. 여유롭게. 내 마음 다치지 않고.


그런데, 참 이상한 건.

이렇게 게을러 보이고, 느린 거 같지만. 이런 호주 시스템의 모든 것이 톱니가 잘 맞춰진 채로 술술술 굴러간다는 것이다.


전기연결이 늦어진다 해도,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일도 없고, 전기요금의 차액을 추가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러니, 나만 발을 동동 구르는 격이었다. 후회했다. 나도 여유롭게 일을 처리할걸.


인터넷의 설치과정이 느리면, 그것을 예상하고 2주 전에 설치 예약을 하면 된다. 그게 가능한 하우스 렌탈 시스템을 가졌다. 2주의 시간차를 두고, 새 집으로 먼저 들어간 후, 새집에 인터넷 세팅이 끝나면 2주 후에 헌 집에서 새집으로 이사를 간다. (아직도 낯선 시스템이지만 호주에서는 가장 현명한 선택으로 보인다.)


또 다른 예로, 지금 당장 아픈데, 2-3일 후에 병원이 예약이 되면, 그냥 집에서 지내다 보면 저절로 낫는다. 병이 나를 불쌍하게 여겨 병원 가기 전에 치료해 주는 기분이다. 그래서 항상 당일날 아침, 예약을 취소하게 된다. 요즘엔 아예 예약조차 하지 않는다. 진짜 아프면 응급실로! 그 마음으로 산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어느 날 문득, 나 혼자 빨리빨리를 외치며, 그들의 문화를 무시했던 건 아닐까. 내가 그들의 여유로움을 방해한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다. 호주에서는 똑같은 24시간을 사용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시간의 반은 자신들을 위해 쓴다. 해가 뜨면, 분주하게 움직이고, 해가 지면 모두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들의 시간을 존중해야 했다.


호주는 자연의 시간에 맞춰 굴러가는 듯하다. 서서히 꽃이 피듯, 그들도 서서히 움직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꽃은 피어 있다. 그런데 나는 나의 인식 속의 시간. 24시간 풀가동이라는 시간을 기대하고, 자연이, 세상이 움직여지길 바랐다. 오늘 불만을 신청하면 내일 해결되고, 온라인 주문을 하면 내일 새벽에 오기를 기대했다. 몇 년을 그랬다.


하지만 이제 자연의 시간을 알고 나니, 나의 24시간은 자연스레 정지되었다. 나도 호주의 시간을 따른다. 자연의 시간을 따른다. 그렇게 호주의 방식을, 호주의 문화를, 호주의 속도를 알려고 노력 중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이해하려 해도 모두를 알 수는 없겠지만, 5살의 기준으로 배워가는 중이다. 나는 호주에서 5살이니까.



호주의 여유로운 삶은, 내가 해석하기로,

여백이 있는 삶이다. (나에겐 약간의 불편함은 있지만,) 문제가 생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천천히 순리대로 해결을 하면 되는 삶이다. 그리고 각자 하는 일에 충실하고, 여유의 시간을 나에게 주는 삶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에, 나의 가족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이다.


나도 그들의 문화에 스며들고 있다. 아주 사소한 생활습관부터 호주의 시간에 맞춰, 호주와 여유롭게 굴러가려고 노력 중이다.


호주의 여유를 내가 종합해서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내가 경험한 호주에서의 삶에서,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호주의 여유’다. 이런 게 내가 느끼는 여유로움이다.




하지만 또 여유로움의 이면에는 다른 반격이 숨어 있다! 여유로움을 누리며 살다가 그 이면을 모르고, 내 삶을 망가뜨릴 뻔한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


                    



화 / 금 <나는 호주에서 5살이다> 발행됩니다.


현재 특별매거진 <근아 놀이터에서 놀아 볼까> 발행 중입니다.(12월 17일 - )


화 / 금 - <나의 삶에는 동화가 있다> 연재

수 / 토 - <나는 호주에서 5살이다> 연재


매달 12일 <메이페이퍼의 브런치 성장일지> 매거진 발행

<메이페이퍼의 영어버전> 매거진 발행 예정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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