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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가네. 내가... 영국을.

2025년 영국여행 EP.04

by 근아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영국여행 취소하면 안되요?



출국1일전

...

30분이 흐른 뒤, 배달 도착 알림이 울렸다. ‘현관 앞에 놓인 봉투가 내 앞까지 날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작은 알약 하나를 위해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아 침대에서 일어났다. 약을 먹고 다시 누운 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4~5시간 동안 잠든 건지, 기절한 건지 모를 깊은 낮잠에 빠졌다.


다행히도 한 알의 진통제로 두통은 사라졌다. 늦은 점심을 먹고 정신을 차려보니 오후 5시. 영국행 비행기 출발까지는 이제 24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지하 세탁실에서 여행용 캐리어를 꺼내 들고 올라와 본격적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출국 당일,

새벽부터 일정이 빼곡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브런치북 글을 쓰고 발행한 뒤,

30분간 코칭을 하고,

곧바로 『엄마의 유산』 전체 회의에 참석했다.


한국과 호주의 시차 때문이었을까.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계산해 둔 시간보다 여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자 남은 시간은 고작 1시간. 집안을 정리하는 일은 포기하고 짐이나 제대로 챙기자 계획을 변경했다.


그런데 그 분주함이 아이에게도 전해졌던 걸까. 샤워를 하러 들어간 아들은 평소보다 서두르다가 그만 샤워실 유리문과 타일 벽 사이에 손가락을 세게 찧고 말았다.

“아악—!”
화장실로 달려갔을 때, 가운데 손가락은 이미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 영국… 못 가는 걸까?’


아이를 먼저 진정시켜야 했다. 얼음찜질을 하고, 다친 손가락의 상태를 살피면서도 내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심장은 쿵쾅거리며 속도를 높였고, 아직 남아 있던 빈혈의 증세 때문인지 분주하게 움직이다보니 숨이 가빠졌다. 진정해야 할 사람은 아이가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 내 심장에도 얼음찜질을 얹어둘 수 있다면, 이 쿵쾅거림도 잠시나마 가라앉아줄까.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절실했다.


다행히 30분쯤 지나자, 울고불고 하던 아이도 조금씩 진정되었다. 개구리 발가락처럼 동그랗게 부어올랐던 손가락도 서서히 제 모양을 되찾아갔고, 뼈에도 다행히 이상은 없어 보였다. 샤워할 시간마저 눈물로 다 써버린 아이는, 그제야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I'm sorry, mum”

나는 철렁한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아냐, 엄마가 괜히 빨리빨리 하라고 해서… 엄마가 미안해.”


그렇게 한바탕 울음소동이 지나가고 나자, 우리에게는 다시 웃음이 번졌다.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남은 짐 정리를 서둘러 마무리했다.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은 어쩔 수 없으니 샤워도 과감히 포기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려던 계획도 접고, 우버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난장판이 된 집을 대충 정리한 뒤, 현관 앞에 도착한 택시에 짐을 실었다. 문을 닫고 차에 올라타자, 그제야 팽팽하게 조여 있던 긴장이 조금 풀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사님께 물었다.

“퀀타스 항공인데, 터미널 2 맞죠?”
“네, 맞네요.”


택시가 공항을 향해 달리자, 나는 깊은 숨을 내쉬며 짧지만 소중한 여유의 순간을 음미했다. 그런데 마치 그 마음을 방해라도 하려는 듯, 기사님이 말을 걸어오셨다.
“어디 여행 가세요?”
“영국이요.”
“아이들 아직 방학이 아니지 않나요?”
“네, 큰아이는 대학생이라 일주일 방학이라서요. 아들은 방학이 아니지만… 같이 가게 됐어요.”


기사님은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했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잇기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대로 눈을 감겼다.
‘정말 가네. 내가… 영국을.’


얼마나 지났을까, 기사님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공항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 공항 안으로 들어서자,


순간,

어딘가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어긋나 있었다. 내가 오기로 했던 곳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국내선 터미널이었다. 순간, 어리둥절함과 허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영국행이라는 걸 알고 있던 기사님이 왜 나를 국내선에 내려준 걸까? 하지만 곧 깨달았다. 실수는 나에게 있었다. 우버 도착지를 터미널 2로 설정한 건 바로 나였다.


딸아이와 만나기로 했던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버렸다. ‘오늘은 참 애꿎은 날이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처음부터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여행이다. 도대체 얼마나 특별한 여행이길래, 이렇게까지 여러 번의 작은 희생(?)을 요구하는 걸까.


이제는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없었다.
잘 치러내고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공항 내 순환버스를 30분 가까이 기다린 끝에, 나는 터미널 1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영국, 쉽게는 못 가게 하네, 정말.'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꿈을 만나러 영국에 가다> 브런치북은 월, 수, 일요일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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