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국여행 EP.05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정말 가네. 내가... 영국을.
시드니 국제공항 터미널1 - 국제선 출국장.
드디어 딸아이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그곳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 도착이었다. 딸아이는 캔버라 기숙사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바로 공항으로 왔고, 우리는 한 달 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딸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반가움이나 미안함보다 먼저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함께 헤쳐 나갈 동지가 생겼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홀로 짊어져야 했던 책임이 둘로 나뉘는 기분이었다.
이런 순간마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다. 만약 내가 철분 주사를 맞지 않았다면, 이 모든 과정을 과연 감당할 수 있었을까. 상상만으로도 아찔해 눈을 질끈 감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억지로 그려보지 않으려 고개를 저어 생각들을 돌려보냈다.
원래 계획이라면 공항에서 점심을 천천히 즐기며 여유 있게 출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시간은 예상치 못한 일들에 모두 흘러가 버렸다. 우리는 서둘러 셀프 체크인과 짐 부치기를 마치고 곧장 입국장으로 향했다.
딸은 아직 시간이 충분하니 점심을 먹고 들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마음이 급했다. 여기서 또 지체하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시드니를 무사히 떠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치 시드니가 나를 영국으로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여러 개의 시험지를 차례차례 내미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시험들을 모두 통과하기 위해 단 하나의 목적지만을 향해 걷고 있었다. 입국대를 넘고 싶다는, 간절한 만큼 단순한 마음뿐이었다.
입국장을 통과하며 나는 마음속 깊이 작은 숨을 내쉬었다.
보딩 대기실.
점심을 먹고, 필요한 간식과 영국에서 사용할 콘센트 어댑터를 구입한 뒤, 우리는 약 40분 남짓 남은 보딩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게 구입한 비행기표라 우리의 자리는 비행기 뒤편, 그룹 5에 속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25시간에 달하는 비행 시간이 서서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표를 예약할 때만 해도 비행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출발을 앞두고 보니 25시간이라는 숫자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잠시 들르는 싱가포르에서 테크니컬 환승(연료 보충, 승무원 교체 등)이 있을 거라고는 들었지만, 그때 잠깐 비행기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건지, 공항에서 쉬는 시간이 있는 건지, 명확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 여정은 한국이 아닌 호주에서 출발해 영국으로 가는 여정. 남반구에서 북반구로, 대륙 몇 개를 훌쩍 넘어 유럽의 끝으로 가야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실감하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너무 즉흥적이었던 나도.
그런 엄마를 말리지 않고 묵묵히 따라나선 딸도,
일주일 학교를 결석하고 얼떨결에 따라나선 아들도,
한국에서 출발해 영국에서 만나기로 한 신랑도.
'우리가족. 참 못말린다'라는 생각에 피식,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가자!'
'나를 이끄는 나를 믿으니까.'
시드니 -> 싱가포르 창이 공항
늦게 예약한 탓에 좋은 좌석을 배정받지 못했다. 딸은 혼자 떨어져 앉고, 아들과 나는 나란히 앉게 되었지만, 4좌석이 이어진 공간의 정중앙에 자리하게 되어, 15시간 동안 거의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륙 전부터 몰려온 피로감에 나는 어느새 곯아떨어졌다. 수많은 일들을 통과해온 하루의 끝에서, 긴장감이 실처럼 풀려나가더니 어느새 깊은 잠이 나를 덮친 것이다. 기내식과 간식이 꼬박꼬박 나올 때마다 잠시 깨서 챙겨 먹고, 다시 잠들고… 그 반복 속에서 마치 승무원들에게 세심한 돌봄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퀀타스 항공 첫 탑승 후기는 영국 여행 이야기의 마지막에 따로 남겨보려 한다. 꽤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기내의 불이 낮게 줄어들자, 사람들의 목소리도, 엔진의 진동도 하나의 흐릿한 배경음처럼 멀어져갔다. 그렇게 조용히 멈춰 있는 시간을 맞이했다. 몸과 마음이 비로소 ‘여행 모드’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그 수많은 시험대에 오르느라 고생했어. 이제 좀 쉬어.’
마치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조용히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 ‘시험대’는 단순히 하루이틀의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7년간의 호주 생활, 그리고 20년 동안 두아이의 엄마로서 걸어온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무게였다.
그 무게를 버텨내느라 애써 단단해졌던 마음이, 고요한 비행기의 밤공기 속에서, 마치 진공 상태에 놓인 듯, 모든 소리와 생각이 잦아들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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