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국여행 EP.06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렇게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으로 가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시드니를 떠나려 했던 며칠 동안은 한 시간 한 시간이 끝없이 늘어진 하루처럼 느껴지며 나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그 시간들을 건너는 일은 생각보다 길고 느린 여정이었고, 그 여정을 기록하는 데에도 결국 이 브런치북 <꿈을 만나러 영국을 가다>에서 네 편의 에피소드를 지나고 있다.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Singapore Changi Airport) - 경유지
모든 짐을 챙겨 비행기에서 내린 후, 약 2시간 뒤 다시 '같은 비행기'에 올라 영국으로 향해야 했다. 짧지 않은 환승 시간이었지만, 시드니에서 영국으로 가는 여정의 한가운데서 잠시 공항 바닥을 걸을 수 있다는 건 오히려 발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공항 면세점 구역을 한 바퀴 돌며 간단히 저녁을 먹을 곳을 찾았다. 식욕이 넘쳐나는 아들은 기내식으로 저녁을 먹은 지 두 시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자기 손보다 큰 햄버거를 또다시 맛있게 해치웠다. 그렇게 호주와 영국 사이 어딘가에서, 잠시의 여유를 보내고, 우리는 다시 출발 게이트로 돌아갔다.
싱가포르 창이공항은 다른 곳과 달리, 각 게이트 대기실에 들어가기 전에 별도의 엑스레이 수하물 검사를 또다시 거쳐야 했다.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 줄을 서야 했지만, 묘하게 여행의 실감이 더해졌다.
'이제 진짜 영국으로 가는구나.'
시드니에서 영국으로.
시간은 분명 흘러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시간이 거꾸로 되감기고 있었다.
실제로, 시드니를 떠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비행 노선.
싱가포르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시드니와도, 영국과도 다른 싱가포르의 현지 시간 속에서 나의 시간 개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곳은 경유지가 아닌, 과거와 미래의 경계선 위에 잠시 멈춰 선 ‘틈’과도 같았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여정과 지나온 시간들이 한데 포개져, 시간의 흐름이 잠시 희미해지는 순간. 몸은 공항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시드니의 어제와 영국의 내일 사이를 조용히 오가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나의 꿈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다.
20살 때 꾸었던 꿈.
과거도 아닌 미래, 미래도 아닌 과거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이었다.
희미해진 시간 속에서, 나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다.
영국
토요일 오후 시드니에서 출발해, 지구의 자전 방향을 거슬러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시간을 거슬러 일출과 함께 일요일 새벽 6시(영국 시간)에 도착했다.
중간의 싱가포르 경유 때문이었는지, 쿼터스 항공의 뜻밖의 세심한 서비스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싱가포르에서 밤 시간을 이용해 영국으로 이동한 여정의 시간대 덕분이었는지 모르겠다. 25시간의 긴 비행은 예상과 달리 꽤 편안했고, 오히려 한국으로 가는 10시간보다 짧게 느껴질 정도였다.
충분한 휴식과 수면으로 에너지를 채운 덕분일까.
영국에 도착하기 전, 나는 비행기 안에서 새벽 4시라고 생각하는 어느 시점에 눈을 뜨고 이미 영국의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국 히스로 공항 상공을 한 바퀴 선회하며 착륙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기체 외부 카메라에 일출이 담겼다. 분명 시드니에서 보던 해와 같은 해였지만, 새로운 하루를 영국의 하늘 위에서 맞이하니 감정의 결이 전혀 달랐다. 그 빛과 함께, 다가올 시간들이 조용히 나를 향해 걸어오는 듯했다.
영국에서의 시작이
이토록 찬란한 빛으로 물들다니.
마치 해의 모든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듯,
마음 한가득 충만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30년 전 마음속에 품었던 그 꿈과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영국이다!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 (Heathrow Airport)
‘히스로 공항.’
30년 전의 런던의 옛날 공항을 기억한다. 작고, 천장도 낮고, 카펫이 깔려 있던 아담한 공항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작년에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히드로 다이어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표준어로 ‘히스로’라고 읽는 발음보다는, 책 속에 쓰여진 ‘히드로’라는 표기가 내게는 더 익숙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한편, 책의 표지에 담긴 사진 속 공항은, 전면이 유리창으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의 모습이었다. 그 거대한 영국의 허브 공항을 떠올리며 도착의 설렘을 안고 비행기에서 내렸지만, 우리가 발을 디딘 곳은 터미널 4였다. 규모는 시드니 공항 입국장보다도 작아 보였고,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의외로 단정하고 소박했다. 문득, 30년 전 내가 이용했던 공항이 리뉴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만약 오래된 영국의 정취를 간직한 그 공항 그대로였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 가족을 맞이해 준 한 사람이 있다. 한국에서 우리보다 늦게 출발해 히드로 공항에 먼저 도착해 있던 신랑이었다. 그는 공항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며, 우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여행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 나의 건강상의 이유로 긴급하게 신랑에게 도움을 청한 부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호주에서의 7년을 함께 견뎌온 우리 가족 모두에게 주는 작은 선물 같은 여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7년이라는 시간을 잘 마무리하고, 다시 새로운 미래의 7년을 맞이하고자 하는 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히스로 공항을 벗어나 런던 중심부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는 시간의 결이 겹쳐져 있었다. 현대의 건물들과 과거 어느 시점의 건물들이 뒤섞여 공존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내가 지금 현재에 있는지, 혹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서 있는지 순간 헷갈릴 만큼 묘한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30년 전 기억 속의 런던과 지금 눈앞에 펼쳐진 런던의 풍경은, 마치 오래된 사진과 실시간 영상이 겹쳐진 듯, 기억의 오류가 난 것처럼 낯설고도 익숙했다.
일요일 아침 7시, 런던이었다.
노팅힐에 위치한 숙소까지의 30분 남짓.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조용히 포개어지는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듯,
내 안의 오래된 꿈이 현실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꿈을 만나러 영국에 가다> 브런치북은 월, 수, 일요일에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