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곳을 가본 지가 언젠지. 이 모든 상황이 재밌고 낯설고 설렜다. 무엇보다 '누가 내 옆자리에 앉을 것인가?' 하는 약간의 초조함도 더해서 말이다. 혹시 나를 반가워 않더라도 너무 기죽지 말자는 마음으로 더 밝은 척하며 앉은 지 조금 지났을까. 한 학생이 뉴 페이스인 나를 알아보고 평소 짝꿍에게 먼저 양해를 구한 뒤 곧장 내 옆자릴 차지했다. 정말 나를 위한 배려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 역시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바로 ‘4월의 학생’으로 뽑혀 최근 어학원의 SNS에 포스팅됐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I KNOW YOU. I SAW YOUR POSTING <STUDENT OF APRIL>”
이후 쏜살같이 돌아온 그녀의 재치 있는 한마디.
“DO YOU WANT MY SIGNATURE?”
푸핫! 이, 순발력. 그녀의 유쾌함을 대변하는 명언이었다.
요코하마에서 온 60대 늦깎이 학생, 러블리K
K는 나처럼 혼자 1년간 어학연수를 하기 위해 하와이로 먼저 온 어학연수 선배이자, 학교생활 외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한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나보다 한 달 먼저 졸업하기 전까지 참 살뜰하고 다정한 챙김을 받았더랬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진 K
그녀의 운동신경은 아마도 30년 가까이 즐기던 스쿠버다이빙이 큰 몫을 한 게 아닐까.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스쿠버다이빙 외에도 해질 무렵이면 매일 두 시간씩 와이키키 해변과 비치 파크 주변을 산책하며 터틀, 멍크실(물개)도 만나는 경험도 즐겼다.
하와이와 참 궁합이 잘 맞는 취미이기도 하지.
친구들이 더 기다리는 방과 후 '러블리K의 테니스 레슨' 시간
나 역시 테니스라는 운동을 배우는 것도 즐거웠지만 돌이켜 보면, 60대에도 아랫배 윗배를 통틀어 볼록 나온 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다부진 몸매에 까맣고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늘 입꼬리가 올라간 개구진 미소까지. 긍정적이고 건강한 삶의 에너지에 그저 동참하고 싶었던 이유가 더 컸던 것 같다.
하루의 마무리로 머그컵에 가득 따른 레드와인 한 잔을 즐기는 K
머그컵 + 와인의 조합. 예상했다시피 술도 어찌나 센 지 훤한 대낮부터 시작해 까만 밤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제일 끄떡없는 말술러이기도 했다. 야한 농담도 어찌나 찰진지 학교에서 숨겨둔 연륜은 이럴 때 나오는가 보다. ㅎㅎ 그 와중에 예습, 복습과 숙제는 어느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모범생. 이렇게 밝은 K의 인생에도 드라마는 있었다.
한 편의 소설 같은 여인의 인생
보험사를 다니던 K는 일찍이 이십 대에 결혼을 하게 됐지만
사십 대 초반, 한창인 나이에 이혼을 경험하게 된다. 둘은 아이를 간절히 원했고 이를 위해 노력했지만 임신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했다. 부부 사이는 둘만 아는 법이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이런 이유가 하나둘 쌓였던 게 아닐까 싶다. 이후 K는 이혼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이십 대 때부터 즐기던 테니스를 다시 시작했고, 오십 대에 운명처럼 테니스 코트에서 참 잘 맞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새로운 인생의 동반자를 만난 후
그와의 재혼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회복할 때쯤... 하늘도 무심하시지.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남편이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참 행복했다던 두 번째 결혼. K의 콘도에 놀러 갔을 때, 그녀의 책상 한가운데 수호천사처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편 사진이 놓여 있었는데, 이것만 보아도 얼마나 둘의 애정이 남달랐을지 가늠이 됐다.
걷지 않은 새로운 길, 요양보호사에서 유학생으로
이혼과 사별을 겪으며 그녀의 손에 남은 것은 첫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때 위자료로 받은 맨션 한 채.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는 진짜 홀로서기를 위하여 K는 뒤늦게 요양보호사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게 된다. 내가 아는 러블리 K라면 당연히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료이자 직업인이었을 텐데도 K는 겸손히 말했다. "내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었던 건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야."라고. 육십 대의 K 역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용기 있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늘 염원했던 유학생이 되기 위해 하와이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나와 함께 해변을 걸으며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하와이에서의 하루하루에 진심이었던 K. 역시 ‘간절함’만 한 동기부여는 없는 것 같다.
누군가에겐 오지라퍼, 누군가에겐 헬퍼
시간이 한참 흐른 뒤 K는 그간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내게 고마움을 전했다.
"메이(나의 영어이름) 덕분에 이곳에서 영어로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겨 정말 좋았어. 네가 오고 나서 영어실력이 쑥 늘었거든." 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 곁엔 늦깎이 어학연수생이 된 일본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보니 오랜 소망이었던 영어로 소통하고자 한 그녀의 열정은 하와이에서마저 희망사항에 가까워져 갔다. 이런 갈증이 있던 가운데 내가 짠하고 나타났다고. 일본어도 쓸 수 없고 오로지 영어로 통해야 하는 새로운 친구가 말이다.
그리 어리지도 않은 나이, 풍부한 사회경험으로 다져진 눈치코치, 둥글게 둥글게 친구들을 모아다 주말이면 여행 플래너를 자처하는 오지라퍼 같은 나의 성격이 누군가에겐 헬퍼처럼 느껴졌다니. 나 역시 K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감사했지만 말이다.
미래를 달리는 여인,
K의 소설은 현재 진행 중
아참,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시 요양보호사 일을 해보려 한다 했다.
요코하마가 항구도시다 보니 외국인 수요도 늘어나고 있으니까, 1년이나 어학연수를 마친 본인이면 좀 더 자격을 갖추지 않았겠느냐며 또 한 번의 미래를 그려보는 멋진 K.
"러블리K, 아니 K 언니, 언니가 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던 어디에 있던 잘할거라고 믿어. 나도 늘 응원할께!!"
이 글을 쓰는 오늘만큼은 머그컵에 와인을 한 가득 따르고 K처럼 하루를 마무리하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요코하마는 차이나타운이 제일 유명하다지. 당시 무슨 말인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요코하마 터줏대감 K의 말이니 큭큭 웃으며 신뢰할 수밖에.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이곳에 세계 최대의 차이나타운이 위치해 있다고.
멀지 않은 날에 K와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에서 술 한잔 기울이기로 한 약속을 지키러 떠나야겠다. 얼른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또 기대해 본다.
May’s Gallary
Car Ride through Town by Maud Lewis
캐나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모드 루이스'를 그린 영화 <내 사랑>. 오랜만에 나의 러블리K에게 안부를 물으며 이 글의 주인공께 가장 먼저 스토리를 전했다. 현실은 다소 불편할 수 있지만 늘 밝고 행복한 세상을 그려가는 러블리K와 '모드'가 묘하게 닮은 것 같아 몇 년 전 SNS에 남겨둔 내 포스팅 한 자락을 다시 꺼내 본다. #하나보다 #둘이좋은 #내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