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로 엮은 발
교보문고에 들를 때면 미술용품들이 모여 있는 코너를 자주 기웃거린다. 작업의 배경이 될 말한 새로운 종이들은 뭐가 있을지도 궁금하고, 과슈나 마커 팬 등을 사서 ‘마이 그린 테이블’ 결과물들을 단순화해 그리는 작업도 해보고 싶어서다.
부엌 조명에 되도록 반사되지 않으면서 작품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건 한지와 부직포 등의 질감을 가진 종이들이다. 까칠한 질감 덕분에 지루함이 꽤 줄어든다. 한지는 은은한 색감이어서 좋고, 부직포는 원색 위주여서 또 좋다.
서점을 다 둘러보고도 좀더 머뭇머뭇거리는 곳이 있으니 바로 펜톤컬러북이 있는 곳이다. 펜톤칩으로 딱히 할 것도 없으면서 거금을 주고 사야 하는 컬러북 앞에 서면 괜히 마음이 설렌다. 기쁠 때, 속상할 때, 웃음이 날 때, 울고 싶을 때 내 맘에 붙일 수 있는 색깔조각들이 그 수많은 칩들 중 숨어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딸아이와 런던테이트모던에 갔을 때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 앞에서 금방이라도 빨려들어갈 것만 같아 멀찌감치 뒷걸음질했던 기억도 함께 난다.
얼마전에는 딸아이와 함께 쓰기 위해 프리즈마 색연필 134색을 구입한 적도 있다. 비슷한 색깔군에서 5% 정도씩의 미묘한 음영 차이로 색연필들의 느낌이 미세하게 달라지는데, 바라만 보고 있어도 흐뭇하게 배가 불렀다. 이 색들을 다 쓸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이번 <고추로 엮은 발>은 색깔에 욕심을 좀 내봤다. 한 팬시용품점에서 산 소형 대나무 발을 배경으로 여러 색의 고추들을 차례로 쌓아올렸다. 가장 순하게 생긴 노란고추가 가장 매운 것은 참 아이러니했다. 색깔과 공명해온 경험은 이 작업에서 꽤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재료를 구하기 위해 식재료 매장을 둘러볼 때도 비슷한 색감의 과일과 채소들을 차례로 정돈해놓은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전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 감각이 퇴색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