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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없어요 vs 연필 빌려주세요

동네 학원 영어강사로 살아남기 13

by 메이쌤


그런 날이 있다. 아이들이 유난히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쳐서, 수업 진행에 문제가 하나도 없는 날.

준비했던걸 시간 맞춰 탁탁 계획적으로 끝내고 아이들과 환상의 티키타카를 주고받는 날.

반대의 날도 있다. 아이들이 유난히 힘이 없고, 피곤한 상태라 하나의 이야기를 채 끝내기 어려운 날.

아이들은 숙제를 줄여달라는 조르기를 시전하고 나는 받아주는 척 안 받아준다.


다행히 그날은 금요일이라 그런지 그냥 힘이 넘치는 건지 아이들이 피곤에 지친 날은 아니었다.

" 아~~~ 선생님~~~~~~~"


숙제하기 싫은 날 유난히 말꼬리가 길어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그게 아냐 얘들아.

내가 원하는걸 눈치챌 때까지 기다려준다. 떼쓰기 스킬이 안 먹히자 몇몇은 내 얼굴을 보더니 고민한다.

" 선생님!"


자신 있게 번쩍 손을 든 학생이 눈을 반짝이며 빛낸다.


" 저희가 오늘 즐거운 금요일이라 주말을 즐겁게 보내고 싶은데 숙제를 조금 줄여주시면 안 될까요?"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법'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친구가 나왔다.

대견하다. 칭찬해야 마땅하다. 상으로 숙제를 안 낼 순 없지만 두 페이지 정도 줄여주마.




16세 미만의 아이들의 세상은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 추워도 창문 닫아도 되나요?라고 묻지 못하고 아~추워 를 연발한다. 더워도 에어컨 틀어주실 수 있나요?라고 묻지 못하고 아~더워 를 연발한다.

숙제가 하기 싫어도 숙제 너무 많은데.... 만 반복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하는 게 있다면 정확하게 전달하세요. 우리는 대화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

이 말을 기억하는 학생들은 한 반에 고작 해야 한 명 정도다.

이런 생각에 관한 이야기를 동료 강사 선생님과 나눴더니 신선한 대답이 돌아왔다.


" 그걸 학원에서도 해줘야 할까요? 집이나 학교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 그렇게는 생각을 못해봤다.

퇴근 후 곰곰이 학원강사인 내가 아이들에게 관여해야 할 부분, 하지 말아야 할 부분 그리고 관여해도 되는 부분, 하면 안 되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본다. 샤워하다 문득 생각이 정리된다. '교사, 강사, 부모가 따져서 할 일이 아니라 어른이 해야 하는 일이다'


자기중심적 화법을 사용하는 것은 성장과정의 일부다. 하지만 생각보다 듣고 있으면 짜증을 유발하는 경우도 많다. 올챙이 적을 잊은 어른들은 그걸 기다려주지 못한다. 나는 올챙이 적을 기억하는 어른 개구리가 되고 싶다.


"선생님 연필이 없어요"

"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 연필 좀 빌려주세요"

" 그래 여기 있어"


연필이 없다는 말을 듣고 바로 연필을 내주면 상황이 훨씬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아이들은 자기가 한 말을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면 갸웃하는 사람으로 자라겠지. 본인이 원하는걸 정확히 말하지 않고도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크게 당황하고 좌절하게 될 거다.


생각보다 이 부분을 놓치고 있는 부모님들도 많다.

엄마가 처음이다 보니. 아빠가 처음이다 보니 사랑하는 내 아이가 필요해 보이면 말하기도 전에 해결해주는 걸 사랑이라고 알고 계신 분들도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 글 한 조각으로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말할 수 있도록 '연필 없어요'가 아니라 '연필 빌려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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