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학원 영어강사로 살아남기 14
J는 내가 만난 학생들 중 가장 애정이 넘치는 학생이었다.
고등부 개설전이라 중3 졸업과 동시에 학원을 그만두고도 종종 학원으로 놀러 와 '선생님, 잘 지내시죠 ' 안부를 묻곤 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조용한 스승의 날에는 수업 있는 날도 아닌데 살짝 찾아와 조각 케이크와 메모를 남기고 갔다. J의 마음을 감사하게 받으면서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했다. 나를 좋아하는구나, 잘 따라오는구나 그냥 짐작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마음을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 J의 용기와 사랑에 가슴 한쪽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동시에 아차 싶어 나도 운동 선생님, 취미반 피아노 학원 선생님께 감사를 표시했다. 나를 좋은 선생님으로 여겨주는 J덕분에 나는 동시에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J가 연말이라고 편지 한 통을 내민다. 초중고 학생들을 모두 지도하다 보면 고등학생들은 다 커 보이는데 그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줍게 내민다.
"뭐야, 우와 이런 걸 다 썼어? 고마워!"
정신없이 수업이 끝나고 모든 학생들이 집에 돌아간 밤 11시. 학원에 홀로 남아 뒷정리를 하다 문득 J의 편지가 손에 잡혀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고등부 개설로 다시 함께 공부하게 된 것에 대한 기쁨, 열심히 해보겠다는 다짐, 예쁜 글씨로 꾹꾹 눌러 담은 감사 한 줄, 사랑한다는 말 한 줄, 기어코 나를 울린 마지막 한 줄.
'선생님이 기꺼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선생님을 사랑하길 바라요'
내 생에 받은 그 모든 편지들 중 가장 로맨틱한 편지였다.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축복 어린 언사를 들어본 적이 있었나? 아니 말해본 적이나 있었던가. 이런 과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아도 되나, 그만한 자격이 있나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한참을 고민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받은 마음의 크기를 넘어서진 못할 것 같아 부담을 내려놓고 진심을 담아 J에게 답장을 한다.
J야,
넌 항상 선생님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학생이야
올해 연말에 있었던 일 중에 너의 진심보다 더 멋진 일은 없는 거 같아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이 남았지만 2021년은 J의 인생에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해가 되겠지 최선을 다할 거라 믿고 잘 해낼 거라 믿어. 지치지 말고 달려보자.
학생들의 마음은 나를 웃게 하고 울리기도 한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하게 만든다. 나는 매일 공부하지 않으면서 매일 공부하라고 말하는 위선적인 사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되잡는다. 아무 계산 없이 표현하는 사랑에 나는 약해진다. 또 한 번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늘 좋은 학생만 만날 수는 없다. 실제 학원생활에서는 좋아서 기억에 남는 학생보다 당시 해결하기 어려운 일 때문에 기억에 남는 학생이 훨씬 많은 법이다. 숙제 안 해오는 학생, 학부모님과 사이에서 갈등을 만드는 학생, 반 분위기를 어렵게 만드는 학생, 공부량에 비해 기대치가 과도하게 높은학생.. 어려운 과제들은 끝도 없이 많다. 하지만 수년에 걸쳐 한 번씩 등장해 나를 울리는 이 존재들 때문에 내가 아직 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