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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쌤 May 18. 2021

수업하다 엄마가 보고 싶은 날

동네 학원 영어강사로 살아남기 23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정말 많이 듣는 단어가 있다. 일상 이야기를 할 때도, 숙제 이야기를 할 때도, 방학 계획을 이야기할 때도 아마 이 단어를 빼고 이야기해보자고 말하면 아이들은 한마디도 시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엄마다. 


나는 수업을 할 때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애를 많이 쓴다. 그냥 노력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경계한다. 단어가 가지는 힘이 얼마나 큰지 알아서다. 어떤 이유로든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괴로워하는 아이들이 생기는 게 싫다. 반복되는 자잘한 고통에 익숙해져 해탈했다는 듯 웃는 작은 얼굴도 가능하면 지켜주고 싶다. 


물론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것 까지는 막을 수 없다. 부모님은 아이들의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아이들이 부모님에 대해 무슨 이야기까지 하는 줄 알게 되면 놀라 넘어갈 집이 한두 군데가 아닐 거다. 


'우리 엄마 아빠 맨날 주식이랑 코인만 해요' 웃음으로 무마해서 넘겨야 하는 경제상황부터 '아빠는 맨날 맥주만 마셔요 근데 저는 콜라 마시래요' 누군가의 식습관까지. 물론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웃어넘기다가 보면 문득 나도 엄마가 보고 싶다. 






"선생님은 주말에 뭐하실 거예요?"

"쌤은 엄마 보러 갈 거야. 갑자기 엄마 보고 싶네?"


동그란 눈에서 스쳐 지나간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아니! 쌤도 엄마가 있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러네?'  초등 아이들은 '저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닌데요?' 단계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엄마 보고 싶다'는 말은 아기 같은 말이라서 싫어한다. 그래서 어른인 내가 엄마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하는 게 웃긴가 보다.  


나는 외로움을 크게 느끼거나 사람의 온기 없이 못 사는 타입은 아니다. 그래도 엄마는 보고 싶다. 힘들거나 그래서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보고 싶다. 아마 내가 그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 아닐까. 왜 엄마가 보고 싶을까? 의문을 스스로에게 한번 던져 봤다가 금세 거둔다. 서른이면 한참 엄마 보고 싶어 할 나이다. 엄마의 말랑한 팔뚝, 특유의 웃음소리, 약간의 잔소리까지. 엄마의 얼굴이 그리운 날이 가끔 있고 그게 오늘이다. 


동네 학원 한 곳에서 몇 년째 이동 없이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내가 알파벳을 가르친 아이는 벌써 6학년이다. 5학년 때 만난 아이는 내년에 벌써 고등학교를 간다. 내가 낳아 기른 아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성장하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왜 엄마들 눈에는 다 커도 애로 보인다는 건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 다음 수업에 들어가면 이 쪼끄만 아이들이 공부하겠다고 학원에 나와 앉아있는 게 기특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보물들을 대하고 있다는 생각도 새삼 든다. 나도 이랬을까? 우리 엄마도 이랬을까? 학원에 아이들을 보낸 학부모님들도 이런 마음일까?


저학년 아이들 수업이 끝나고 나면 키즈폰으로 엄마에게 끝났다고 전화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키즈폰은 안 쓰지만 나도 수업 끝나고 엄마한테 전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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