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또는 '결'이라는 짐승이야기(2)

사라진 어느 옛 나라의 우화

by 박독수

그 무렵, 이 나라의 북쪽 국경 너머 황무지에 새로운 나라가 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지역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고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땅이 적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직접 만났다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그건 나라가 아니라

그저 도적 떼의 오합지졸일 뿐이라는 말이 더 많았다.

왕은 소문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짐승 사랑에 여념이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웃나라에서 군사가 들이닥쳤다.

이웃나라와의 국경에는 높은 산과 깊은 강이 있어 이 나라는 개국 이래

외세의 침입 따위은 한 번도 겪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백성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도 못 가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화려한 왕궁의 성문은 나무 기둥으로 몇 번 때리자 문틀 째 무너졌고,

병사들은 어디다 두었는지 모를 창칼을 찾느라 우왕좌왕하다가

문틀이 쓰러지는 소리에 놀라 모두그대로 달아났다.


졸지에 위기에 빠진 왕은 왕실의 존속과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을 택하기로 했다.

그런데 겁에 질린 왕이 고개를 들어 보니

적국의 왕은 한 쪽 귀가 없는 평범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왕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너무 쉽게 왕위를, 나라를 포기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다시는 저 아름다운 짐승의 모습도, 소리도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인가

크게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상황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어 아무 생각없이 그냥 땅 위에 엎드려 있기로만 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없이 승리자가 된 이웃나라의 많지 않은 군사들이

아주 오래된 나라의 화려한 옷을 입은 풍채 좋은 왕이,

바짝 마르고 한 쪽 귀마저 없는 초라한 몰골의 젊은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걸 보며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짝귀 왕의 곁에 서 있던,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두른 외눈박이 장수가

앞으로 나서며 평화의 조건을 덧붙였다.

매년 ‘경’ 혹은 ‘결’이라 불리는 짐승 오 십마리와 그 먹이가 될 새끼 가축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처녀와 총각 각 오십 씩 백 명을 공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

항복해서 왕위를 버리고 목숨이라도 지키려던 왕은

이웃나라의 왕이 실은 이 짐승에 욕심을 품고 쳐들어온 것이라 여겼다.

그는 안심을 넘어 기쁨을 느끼며, 돌아가는 이웃나라 적국의 짝귀 왕에게

자신이 아끼던 이 짐승 열 마리를 헌상했다.

이 짐승 덕에 목숨을 건졌다고, 나라를 살렸다고,

왕 뿐아니라 백성들까지 아주 다행으로 여기며 만족스러워했다.

왕은 적군이 물러가자 나라 안에 사는 모든 '경' 또는 '결'이라 불리는 이 짐승을 키우는

모든 이들에게 새끼 가축을 한 마리씩 하사했다.


*


이웃나라의 젊은 왕은 본래 이 나라의 백성이었다.

그는 부모를 잃고 어린 여동생과 함께 남이 맡긴 가축을 키우며 힘들게 살았다.

어느 날 동생이 '경' 혹은 '결'이라 불리는 그 짐승을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오빠에게 말했다.

그래서 둘은 어느 왕족의 집으로 가서 그 짐승을 몰래 구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생은 그 모습에 너무나 황홀했던 것인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오빠 역시 그 아름다운 소리에 취해 동생이 연신 지르는 큰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곧바로 병사들이 달려왔고, 그는 도망쳤지만 동생은 붙잡혔다.

잡혀간 그의 여동생이 다른 소녀들과 함께 순장되어 죽던 날,

그는 스스로 오른쪽 귀를 잘랐다.

그 짐승의 울음소리에 다시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동생의 원수를 꼭 갚겠다는 피의 맹세였다.

나중에 왕이 된 그를 사람들은 짝귀 왕이라 불렀고,

그는 그 별명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한쪽 귀가 없는 대신,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짝귀 왕 곁에 있는 외눈박이 장수 역시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 짐승을 두 어마리 기르는 귀족 집안의 아들이었는데,

어느 날 그 짐승이 갑자기 그를 물어 얼굴을 찢었다.

그런데 피를 흘리는 어린 아들의 부모는 아들을 질책하며 짐승부터 살폈다.

아이는 큰 충격을 받아 울며 그 자리에서 집을 떠났고,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한 한 쪽 눈은 끝내 실명되었다.

굶주리고 방황하던 아이를 치료해 주고,

다시 일으켜 세운 이가 나이가 서 너살 더 많은 젊은이,

훗날의 짝귀 왕이었다.

짝귀와 황무지에서 천신만고를 이겨낸 외눈박이는 한쪽 눈이 없는 대신,

모든 헛된 움직임에 속지 않았다.

짐승의 자태도, 인간의 그럴싸한 꾀도, 말끔한 허울도, 그 하나의 눈으로 간파해 냈다.

그는 한 쪽 눈을 잃은 대신, 제대로 볼 줄 아는 다른 한 쪽 눈을 얻었다.

외눈박이는 짝귀는 국경을 넘어 황무지로 들어가

거친 땅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작은 민족들을 불러모아 복수를 준비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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