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려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번번히 나를 슬프게 한다.
글을 써보려 컴퓨터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이지만,
모두 부질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숙인 고개를 뒤로 잡아젖힌다.
이 세상의 수많은 책과,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그 많은 언설들이
이제는 나에게도 별다른 감흥과 자극을 주지 않는데,
참을성 있게 읽어야 하는 지루한 글보다는
눈과 귀만 열어두면 저절로 쏟아져 들어오는 영상물들이 저렇게 많은데...
다 쓰기도 전에 끝이 보이는
이 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나를 슬프게 한다.
한 노인이 큰 도로의 건널목 앞에 섰다.
보행신호의 파란등이 깜빡거려 곧 빨간불로 바뀔 것이 분명한데도,
노인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길게 늘어선 자동차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느릿느릿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사정을 알 길 없는 뒤쪽의 차들이 조급하게 경적을 울린다.
하지만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좌우도 살피지 않는 채,
마치 마을 뒷산의 오솔길을 홀로 걷는 듯이 발길을 옮긴다.
반쯤 감은 듯, 내 앞을 지나치는 그 두 눈의 빛 없음이 나를 슬프게 한다.
들리지 않는 걸까, 듣지 않는 걸까?
보이지 않는 걸까, 보지 않는 걸까?
저 노인을 이해해야 할까, 비난해야 할까?
한 여름 열기에 바싹 마른 아스팔트 도로를 부술 듯 때리는
그의 지팡이 소리가 나를 슬프게 한다.
빨래를 갠다.
장마 끝에 모처럼 이어진 맑은날 덕에 바싹 잘 말랐다.
여름이라 부피가 큰 옷은 별로 없고 죄다 얇은반소매 티셔츠와 수건들이다.
하나하나 접어서 차곡차곡 쌓는다.
남은 옷가지 속에 서너개 아내의 속옷이 보인다. 오래된 듯 색이 바랬다.
실밥도 보이고 작은 구멍도 나있다.
접다보니 하나 뿐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내 아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니,
비슷하게 낡았지만 수건들은 엣지 있고 예쁘게 개어지는데,
어떻게 해도 마음에 들게 개지지 않는 아내의 속옷들이 나를 몹시 슬프게 한다.
매미가 운다. 올해는 유난히 매미가 많다.
취준생 딸은 매미소리가 세가지라 하는데,
내 귀에는 둘 뿐이다.
하나는 바닷가 바위에 가만가만 쉼없이 부딪히는 파도소리다.
여러마리가 동시에 웅얼대도 소리가 낮아서인지,
저 아래 나무들에 붙어 우는 탓인지 귀에 거슬리지 않는 배경음악처럼 들린다.
문제는 잔잔한 파도의 코러스를 깨고 들려오는 소프라노 매미 소리다.
활짝 열어둔 아파트 창문의 방충망에 착 달라붙어
아침 알람소리보다 먼저, 더 요란하게 고음을 발사한다.
때로는 서너 마리가 모여 내가 달려갈 때까지 고음 경연대회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성맞은 매미소리도 이제 끝물이다.
매미는 거의 오지 않고 가끔 오더라도 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
저 곤충은 땅속에서 굼뱅이로 7년, 땅 위에서 매미로 7일을 산다는데,
그 7일이 벌써 다 지난 것일까?
나를 괴롭히던 소리,
희미해지다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매미소리에 나는 전혀 기쁘지 않고
갑자기 왠지 모를 슬픔을 느낀다.
나는 왜 이 이른 시간에 잠자지 못하고 깨어있는 것일까?
왠지 모를 슬픔이라고?
아니다, 모르지 않다.
이제야 깨닫노니, 매미 탓이 아니라 세월 탓이다.
누구라도 피할 수 없듯 나에게도 생체리듬의 변화가 들이닥친 것이다.
나의 정신은 아무리 청년을 열망한다 하더라도
나의 육체는 그 열망을 더는 감당해 낼 수가 없다.
아무리 날개를 비벼대도 소리를 낼 수 없는 저 매미처럼
나의 시간도 이제 끝자락에 와 있는 게 아닌가!
매미 탓이 아니라 세월 탓에
잠이 없어졌다는 이 새벽의 깨달음이 나를 슬프게 한다.
젊은 숫사자처럼 용맹하던 이 여름이 가고 있다.
그의 풍성했던 갈기는 눈에 띄게 빠지고, 마주치기조차 두려웠던 두 눈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아직은 조금은 어두운 이른 아침,
검은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낯선 사내,
힘겨웠던 여름의 끝자락을 쉽게 놓지 못하는 낯선 사내의 몰골이 나를 슬프게 한다.
있는 힘껏 입을 벌려 이빨을 드러내지만
이제는 아무에게도 겁을 주지 못하는 그의 무기력한 포효가
나를 슬프게 한다.(끝)
* 저의 글 정원 주소입니다. 잘 가꾸려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