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빛과 그림자
친구 덕에 모처럼 서울 구경을 다녀왔다.
국제결혼을 한 친구의 사돈 부부가 방한했는데,
친구의 아들 부부는 바쁘고, 자기는 영어가 짧으니 동행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년 전에, 짧지 않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지방 소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에 익숙해졌다고 여겼지만,
내 무의식 속에도 서울에 대한 '향수' 나 그리움 비슷한 것이 있던 것일까,
별다른 망설임 없이 합류했다.
여의도에서 저녁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과 수도권에서 보냈지만,
이렇게 많은 관광객, 그것도 외국인들과 함께 한강 유람선을 타는 것은 처음이다.
대부분 중국인 속에 가끔은 일본인, 히잡을 쓴 사람들, 인도인들,
어쩌다 하나씩 내 친구의 사돈과 같은 백인들이 보였다.
티켓을 끊는 나와 친구에게도 매표원은 영어로 설명하려 했다.
내가 아는 낯익은 얼굴은 더는 만날 수 없고,
홍콩이나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 같은 국제도시,
젊고 낯선 얼굴들,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의 서울이 거기 있었다.
일기예보는 수일 동안 비가 많이 내릴 거라 했지만,
비는 오전에 아주 잠깐 내렸고,
오후 내내 흐렸던 하늘에는 저녁 무렵에 해가 보였다.
한강은 상류 쪽에서의 방류 탓인지 수량이 많아 강폭이 어느 때보다 넓어 보인다.
배가 도도한 강물을 거스르며 출항을 준비하는 동안,
3층 갑판 위를 가득 메운 관광객들은 쉬지 않고 카메라를 눌러댄다.
그 인파가 만들어내는 소음과 유람선의 매캐한 휘발유 냄새 속에서,
나는 이 풍경을 처음 마주한 벽안의 두 이방인에게 뭔가를 알려줘야 한다.
하지만 내내 마음이 켕긴다.
내가 도대체 한강에 대하여, 서울에 대하여,
시시각각 변신하는 대한민국의 수도에 대하여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원효대교에서 출발한 배는 이윽고 한강철교를 지나 동쪽으로 노들섬 쪽을 향해 가고 있다.
예전과 다르게 노들섬에도 알록달록한 복장의 사람들이 빼곡하다.
북쪽으로 마포와 용산, 이촌동 쪽으로 이어지는 빼곡한 아파트 숲이 늘어서 있다.
함께 배를 타고 한강과 좌우의 경치를 구경하는 관광객들,
저들이 혹시 나보다 서울을 잘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들은 K드라마, K팝, K뷰티 등 다양한 경로의 K을 통해 갖게 된
서울이라는, 한국이라는 비주얼 속의 공간을
오감으로 느끼며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게 아닌가?
강남의 상류층들이 어떻게 사는지, 청춘남녀가 어떻게 만나고 헤어지는지,
어떤 장소와 식당이 이른바 '핫플레이스'인지
요즘의 대중문화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그들은 나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른다.
그런저런 생각에 나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한다.
나는 나의 손님들에게 그저 대다수 서울 거주자들의 주거형태가 아파트이며,
특별히 한강 조망권의 아파트들이 매우 비싸다는 정도만 이야기한다.
내가 그들보다 좀 더 잘 아는 건,
저 반짝이는 건물들을 둘러싼 끝 모를 탐욕과 쟁투, 실패와 파탄,
좌절과 분노의 이야기들 뿐이다.
그러니 나의 이야기는 그들이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관광이 무엇인가? '빛을 본다'는 뜻 아닌가?
굳이 그들에게 건물 뒤에 드리워진 깊은 그늘을 보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배는 반환점인 반포대교 조금 못 미친 곳에 잠깐 떠 있다.
해군복장의 유람선 안내인이 반포대교 무지개 분수 쇼가 곧 시작될 거라고 알린다.
하지만 이미 배가 돌아서 등을 돌린 탓에 3층 갑판 후미에서만 겨우 볼 수 있다.
그마저도 사람이 잔뜩 몰려 여의치가 않다.
무지개를 보기 위해서는 치열한 몸싸움이 필요하다.
우리 일행은 처음부터 그 싸움을 포기했다.
끝내 무지개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을 때,
여의도로 돌아가는 배의 앞머리에서 무명 여가수가 생음악 공연을 시작했다.
승객들의 구성을 고려한 것일까, 노래의 레퍼토리는
팝송과 샹송, 가요 몇 곡, 그리고 끝으로 아리랑이었다.
몇몇은 박수를 치며 호응했지만, 대부분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관광객들의 카메라는 모두 갑판 위에서 붉어지는 저녁노을을 향해 있을 뿐
가수를 찍는 카메라는 거의 없었다.
한 곡도 자기 노래를 불러보지 못한 가수,
언제나 프로 가수의 노래를 부르며 비교당하는 아마추어 가수,
한 번도 떠나갈 듯 한 박수를 받아보지 못한 가수,
제대로 된 밴드의 풍성한 연주 속에 노래를 부르고픈 가수.
그녀가 만일 아이유였다면,
로제나 지수, 리사였다면,
윤아 혹은 태연이었다면...
여의도는 내가 본격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십수 년 동안 이곳저곳, 속속들이 밟아 본 섬이지만
멀리서, 해 질 녘에 보는 빌딩들의 모습은 왠지 낯설다.
오랫동안 여의도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63 빌딩은 전신으로 햇빛을 반사하며
거대한 금괴처럼 우뚝 서 있지만,
관광객들의 시선은 쉽사리 서쪽의 금융타운에 세워진 새 빌딩들로 향한다.
통일교 부지와 중소기업회관이 있었던 자리에
고층의 호텔과 오피스, 백화점이 들어서있다.
MBC 사옥은 철거되고 대신에 고층의 아파트와 오피스, 오피스텔이 서 있다.
멀리 서쪽 하늘의 노을을 배경으로
붉고 화려한 조명으로 자체발광하는 마천루를 올려다보며,
관광객들은 오감으로 서울과 한강의 밤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나는 불편하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청춘을 불사른 이곳이었지만, 나 역시 이곳을 떠날 때 박수를 받지 못했다.
저 수많은 기업과 빌딩들의 상층, 펜트하우스를 차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넥타이맨들이 지금도 저 안에서 서로를 밟으며 싸울 것이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루저가 아닌 승리자,
실패담이 아닌 성공 스토리뿐이다.
내가 들려줄만한 특별한 이야기는 없다.
배에서 내리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내가 탔던 2층에서 내려와 1층에서 일행과 함께 줄을 섰다.
문득 돌아보니 그녀가 보인다.
아까 그 무명의 여가수가 저만치 떨어진 소파에서 누워있다.
고단한 노동의 지친 하루였을까?
일도 하지 않고 구경만 다녔는데 나 역시 피곤함을 느낀다.
빨리 숙소에 돌아가
깊고 긴,
늦잠을 자고 싶다.
서울의 밤은 오늘도 불야성으로 빛나고,
나는 그 밝은 빛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잠들 것이다.(끝)
* 저의 글 정원 주소입니다. 잘 가꾸려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