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Coen brothers, 2008)
1.
영화보기를 다른 것에 비유하자면,
아마도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 중계 관람과 비슷하지 않을까?
경기 관람은 우선 내가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가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에 해당된다.
주인공은 미남미녀이거나, 능력이 탁월하거나,
아주 착하거나 운명이 기구해야 한다.
뭐 한가지라도 주인공을 편들고 좋아할만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
굉장한 미남인데 능력은 없다? 글쎄...
대단한 미녀인데 못되먹었다? 아쉽지만 노 땡큐!
내가 본 영화의 주인공은 대개 이 모두를 갖췄지만,
간혹 한 두가지가 모자란 경우도 있다.
다음, 영화도 스포츠처럼 어느 정도 공감하고 이해할만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감독 마음에 달린 거라지만, 너무 쉽고 뻔하면 안된다.
그렇다고 어처구니 없는 스토리, 턱도 없는 과장 혹은 비약,
느닷없는 반전 역시 짜증을 불러온다.
각이 너무 뻔해도, 너무 안 보여도 우리의 인내심은 곧 바닥이 난다.
마지막으로 경기 결과가 아주 중요하다.
어쨋든 우리 팀이 이겨야 기분이 좋다.
상상할 수 없는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주인공은 승리해야 한다.
명쾌한 권선징악이 아니면 뭔가 찜찜하고 불편하다.
설사 주인공이 장렬하게 죽더라도 악은 반드시 심판받고 평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진 경기를 보고 난 것처럼,
어딘가 섭섭하고 서운하다.
이 따위 영화를 보려고 돈과 시간을 낭비했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모두가 예외없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즐기고 소비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2.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낯설다.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세 인물 르웰린 모스(조슈 브롤린),
보안관 에드(토미리 존스),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 중에 주인공은 누구일까?
모스는 베트남 참전 장교로서 투지와 약간의 양심이 있기는 하지만
땀흘려 번 내 돈이 아닌,
어쩌다 주운 돈 200만불에 목숨을 거는, 이름 대로 불나방 같은 존재다.
명분이 부족하다.
보안관 에드는 어떤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에 걸맞는 늙은 보안관으로서
영화의 처음과 끝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하니 주인공에 가까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지쳐있고, 한 일도 없는데 무기력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숨거나 뒷북을 치거나 늘 회피한다. 탈락!
그렇다면 남은 한 사람, 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가 주인공이라고?
그의 살인능력이 아무리 탁월하고 그 존재감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아니 영화를 보고나서 며칠간이나 느껴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양심과 교양은 그를 주인공으로 인정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가 의인이고 악인인지,
누가 주연이고 조연인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영화 속으로 끌려들어가 이곳 저곳을 헤맨다.
누구를 응원해야 할 지도 모른 채 경기장에 앉아 있는 이 난감함...
이 것이 바로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첫번째 요인이 된다.
3.
다음은 경기 내용을 살펴보자.
꼭 누구를 응원하지는 않더라도 경기가 재미있으려면 일방적이지 않아야 한다.
적당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막판에 승패가 결정나면 최상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이다.
모스가 득점하는 순간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영화 초반에 그가 갱들이 풀어놓은 개에게 뒤를 쫓기다 강을 가까스로 건넜을 때,
그는 그를 덮치는 개를 쏘아 죽인다.
또 안톤 시거와의 총격전 끝에 시거에게 다리 부상을 입히기도 한다.
순수하게 모스와 안톤 시거와의 1:1 대결이었다면 무승부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는 모두 살인마 안톤 시거의 일방적 승리를 보여준다.
처음 경찰관을 목졸라 죽일 때 부터,
무고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이유도 없이' 죽이는 과정에서,
자신을 고용한 갱들을 죽이거나 갱의 보스가 보낸 킬러를 죽이거나,
심지어 그 보스를 죽일 때까지
그는 단발머리를 조금도 흩트려지지 않은 채,
피묻은 양말을 벗어 던지거나 신발의 피를 털어내는 정도의 불편함을 겪을 뿐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는다.
가장 황당한 것은 그가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이 치열한 총격전이 아니라
한가한 동네 골목에서 전방주시 태만으로 난 교통사고 때문이라는 점이다.
앞 선 이야기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이런 장면들은
자꾸만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인내심을 잃게 한다.
4.
이제 끝으로 경기 결과를 따져보자. 우선 권선징악은 처음부터 아니다.
물론 살인마 안톤 시거가 악마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모스 르웰린이나 에드의 승리가 사필귀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장렬한 죽음? 이것도 아니다. 모스는은 안톤시거와 대결하다 죽은 게 아니라
낯선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허접한 멕시코 갱들에게 죽는다.
거악의 파멸? 아니다. 갱들 뿐 아니라 평범한 서민들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는,
심지어 새에게까지 총을 쏴대는 안톤 시거는 교통사고로 팔을 다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인간이 끝내 죽지 않다니, 화를 내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보안관 에드는 어떤가? 안톤 시거를 죽이지도 못하고, 모스 르웰린과 그 아내를 지키지도 못한,
아니 의도적으로 외면한 늙은 보안관의 슬기로운 은퇴생활이
이 영화의 아름다운 피날레가 될 수 있을까?
쫓기는 자들은 결국 죽고, 무자비한 살인마는 다치고, 내내 비겁한 자는 멀쩡하다니,
정말 못마땅한 결말이 아닌가?
권선징악도, 장렬한 최후나 거악의 파멸도 보여주지 못하는 이 영화는
도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무래도 서양의 정서는 우리와 다른 것일까?
이런 영화에 아카데미는 왜 하나도 아닌 여러 개의 트로피를 갖다 바쳤나?
우리 가운데 상당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의 영화 독해력을 의심하지 않았을까?(계속)
* 저의 글 정원 주소입니다. 잘 가꾸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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