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재료듵>>, 오성은 지음, 호밀밭 펴냄
여행과 관광은 다르다. 관광 그 이상의 여행은 어떤 것일까?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겪고, 살고, 부딪치고, 깨지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자고, 깨고, 쉬고, 뛰고, 멈추고, 걷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다독이고, 읽고, 쓰고, 만나고, 헤어지고...이런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고 이야기를 만드는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여행의 재료들>>이란 감각적인 여행 에세이를 만났다. 글을 읽었다기보다 여행자와 여행지를 만났다고 해야 맞겠다. 살짝 건들기만 해도 붓에서 물감이 뚝뚝 떨어지듯 감수성 넘치는 저자 오성은과 그가 겪은 호주와 프랑스, 필리핀을 만나 보았다. 스치듯 지나치는 여행이 아니라 한 곳을 응시하며 적나라하게 마주한 여행이어서 신선했다.
여행자는 조금 긴 기간 동안 호주에 머물렀다. 접시 닦기, 옥수수 껍질 벗기기, 파프리카 상자 나르기, 가구 공장에서 나무 자르기 등의 노동을 하며 여행을 했다. 낯선 땅에서 육체 노동은 생계를 위해 필요했으나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같아 보인다. 만일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안일하게 익숙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면, 절대 겪어보지 못했을 노동의 현장으로 내몰린다. 맘껏 즐기고 누리는 여행이 아니었기에 그 여행이 더욱 숭고해 보였다.
“나는 적도 너머의 나라에서, 도로 위를 내달리는 신기한 트램을 타고, 거꾸로 된 계절을 따라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왠지 모를 이질감에 시선을 분리해 트램의 밖과 안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이쪽에, 그리고 기억의 대부분은 저쪽에 존재했지만, 역방향의 의자에 앉아 있어서일까, 지나간 풍경은 보다 오래도록 눈에서 달아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다음 정류장을 향해 거꾸로 달리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과거는 늘 닿을 듯 말 듯 멀어져만 갔고, 미래는 등 뒤에서 자꾸만 옷깃을 잡아채는 것이다.”(136쪽)
연극을 보러 극장으로 가는 길 위에서 여행자는 과거를 소환하고 현재를 인식하며 미래를 조금 상상하고 있다. 이 여행자는 평범한 것을 살짝 비틀어 보고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프랑스에 가서는 누구나 가 볼 듯한 유명 관광지를 제쳐두고 묘지를 전전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보들레르와 프루스트, 사르트르와 조우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곳에 누워 있었고, 누운 채로, 가만히, 저를 기다려 주었고, 그리고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160쪽)
<<여행의 재료들>>에서 만나는 사색과 감성이 충만한 글과 사진을 보다 보면 어느새 이 여행에 빠지게 된다. 여행자는 조금 불친절하게 보이기도 한다. 여행지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사진에 대한 설명도 생략한다. 그런데 이 여행 흥미롭다. 여행자가 지닌 깊은 감수성이 예리한 통찰력과 만나 낯선 것에 의미를 부여해 버린다. 그러면 그 어떤 낯선 것도 친근한 이야기가 되고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