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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줄 알았어요

by 이경


살면서 가장 재밌게 본 TV 드라마를 꼽으라면 역시 <모래시계>다. 그때의 고현정은 아름다웠고, 이정재는 과묵했으며, 박상원과 최민수는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초딩 6년 때였나 보다.

당시 <모래시계>가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초딩 상대로 미래의 꿈 앙케트를 조사했는데 1위로 무려 '정치깡패'가 나오기도 했다.


<모래시계>의 여러 명장면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극 중 박상원이 검사가 되기 위해 사법 고시를 보았던가. 합격 통지서가 우편인지 등기인지로 날아가고, 같은 하숙집에 살던 조민수가 먼저 보고서는, "합격했어요. 선생님 합격했어요!" 라며 유난을 떨던 장면.


그때 박상원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말투로 "알아요. 합격할 줄 알았어요."라고 대답을 한 것이다. 물론 내 몹쓸 기억으로 정확한 설정이나 워딩은 다르겠지만 대충 이러했다는 것이다. 기쁨을 전달하려 했던 조민수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박상원의 말투와 대사를 보면서, 꺄~ 멋지다. 간지 대폭발, 같은 생각은 아니 들었고. 뭐야 재수 없어, 라는 생각을 했다. 세상천지 몇 사람이나 시험 결과를 미리, 그것도 합격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 이건 분명 천재들의 구역에서나 나올법한 일이겠지.


박상원 대사에 따른 나의 생각은 한편으로는 나는 그리 될 수 없다는 질투이기도 했던 것인데, 나 역시 크고 작은 시험을 보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중3 때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연합고사를 보고, 고3 때는 망해버린 수능을 보고, 그 후에는 운전면허 시험도 보고.


운전시험 필기만이 거의 유일하게 박상원처럼, 붙을 줄 알았어요,라고 얘기할 수 있었던 수준의 시험이었다. 그 외에 세상이 내준 시험 앞에서는 한 번도 "될 줄 알았어요."같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기껏 근사치가 "될 수 있을까", "되지 않을까", "잘하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도였던 셈이다.


나는 언제쯤 시험을 보고서 옛 드라마 박상원처럼, "될 줄 알았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까 싶으면서도, 뭐, 생각해보면 결과를 미리 예측하든 못하든 시험 합격만 하면 장땡 아닌가 싶다. 모로 가도 서울, 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꼭 천재라서 시험 결과를 확신하지 않더라도,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의 마음가짐으로 세상이 내준 시험을 대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물론 합격만 할 수 있다면.


뭐, 시험을 본 것은 아니지만, 출판사에 투고하고 계약을 맺는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될 줄 알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순간은 없다.

지방 출장 갔다가, 서울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문득 박상원의 심드렁한 말투가 떠올라서.

어쨌든, 모로 가도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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