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저와 청탁

by 이경

출판사 편집자님들과 메일을 주고받는 일이 즐겁다. 뭐 작년 중순까지야, 출판사에서 온 메일이라 함은 출판사 출간 방향, 뭐 그런 게 있다고 치고서, 네가 보낸 글은 암튼 간에 출판사와 맞지 않아 반려한다는 메일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반려라 해도 편집자들의 정제되고 예의 넘치는 메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달까.


글 쓰면서 혹시라도 공저 의뢰나 청탁이 와도 나는 안 해야지, 생각했는데. (자기 분수를 모르는 타입임) 일단 공저는 다른 작가들에게 민폐를 끼칠 것 같고, 청탁은 내가 어마무시한 쫄보라서 마감 압박을 이겨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한 출판사 편집자로부터 공저 청탁 연락이 온 것이다. 아니, 나에게도 드디어 원고 청탁이.


편집자님 제가 쓴 책 보셨나요? 했더니 노노 아직 완독 못함, 이라는 답이. 으헉 ㅋㅋ

아, 이거이거 편집자분이 나를 굉장히 과대평가하고 계시는구나, 큰일이다, 앞으로 내가 이 사람에게 안겨줄 것은 커다란 실망감뿐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책 없는 편집자+글쟁이 콤비가 탄생할 것 같고, 평소 하지 않으려 했던 공저+청탁이라 슬금슬금 발을 빼려 했는데 보여주신 기획안을 보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마감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는 초라한 닝겐. 기획안을 접하고 하루 동안 a4 한 장을 쓴 나는 다음날 8장을 더 써서 편집자님에게 원고를 보내버렸다. 편집자님은 아마 당황스러워하지 않았을까. 아 이 생키는 뭔데 계약도 안된 상태에서 원고를 보내온 걸까, 했을 것 같다.


아, 그러니까 나는 마감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아예 계약 전에 원고를 써버리고야 마는, 이를 테면 칼마감의 요정인 것이다. 며칠 동안 원고 피드백이 없어서, 아 나 까인 걸까, 역시나 편집자님이 나를 과대평가하셨던 걸까, 눈물 샤워 예정이었는데 많이 바쁘셨다고.


추론상 편집자님이 출판사에 감금을 당하고 계신 것 같다. 실제로 감금과 착취를 당하고 있는 거라면 추후에 신호를 달라고 하였으니, 나는 경찰을 불러 편집자느님을 살려내도록 하겠다.


요즘 들어 몇몇 출판사 편집자, 마케터 분들이 SNS 팔로우해주셔서 뭐랄까, 나름의 자기 PR의 시간이랄까.

아, 제가 이렇게나 칼마감의 요정입니다! 계약 전에 이미 원고를 써서 보내는 바로바로 서비스, 5분 대기조 가능한 글쟁이입니다!, 라고 얘기하려던 것은 아니고. (사실 맞습니다. 편집자님들 보고 계십니까?)


원고 청탁이라는 거 막상 경험해보니 어어? 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도 들고 평소 친구 없는 히끼꼬모리라 공저 책에 참여하여 워워 나는 이런 분들과 같이 글을 쓰는 사람, 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꽤 괜찮은 기분이다. 근데 어떤 분이 공저로 참여하실지 작가 섭외도 아직 안 끝난 상태. 으힉. ㅋㅋ


암튼 요즘에도 편집자분들과 메일을 주고받는 일이 즐겁다. 편집자의 메일을 열어보는 것은 마치 복권을 긁는 기분이랄까. 지금 연락을 주고받는 편집자들은 단 한 번도 나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는 구원의 천사인 것이다. 우울하거나 침울할 때 나는 편집자들이 보내온 메일을 열어보며 엉엉엉 누군가 내 글을 좋아해 주고 있떠영 엉엉엉 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나는 원래 책 나오기 전까지 설레발을 안 치는 사람인데.

같은 집에 사는 여성에게 데뷔작 계약, 출간 일정 공유 안 했다가 욕 엄청 먹음. 시무룩.


이번에는 청탁이 들어온 기념으로다가 한번 떠들어봤습니다.

앞으로는 다시 설레발치지 않는 사람으로 갑자기 짠! 하는 소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편집자분들 보고 계십니까?

이상 칼마감의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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