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 타이밍과 신춘문예

by 이경



회사에서 등기 따위를 보낼 일이 있으면 우체국에 안 가고, 근처 우편취급국을 간다. 창구 세 개짜리의 아담한 곳이다. 창구에서 일하는 사람도 보통 두, 세명이라 손님이 많을 때는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오늘 사무실에서 등기 보낼 게 있어 오전에 취급국을 갔더니 창구에는 두 사람이 앉아 일을 보고 있고 손님은 한가득이다. 대기 인원 서른 여명. 아이고야, 이렇게 오래 기다릴 순 없다 싶어 사무실에 들어왔다가 점심시간이 지나 다시 취급국에 갔더니 여전히 대기인원은 서른 여명.


연말이라 그런 건지, 월초라서 그런 건지 이유는 알 수 없다만 평소보다 부쩍 사람이 많았다. 어쨌거나 등기는 오늘 보내야 해서 대기 번호표를 뽑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한 시간 정도가 흘러서 번호표와 등기 우편을 들고서 우편취급국을 세 번째 방문하였더니 창구에서는 265번 손님과 266번 손님의 우편을 받고 있었다. 내 손에 들고 있는 번호표를 보았더니 267번. 오, 번호가 지나가지도 않고, 한참 남은 것도 아닌 바로 뒷번호. 그야말로 나이스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살면서 나이스 타이밍 다섯 손가락 안에 들겠다 싶을 정도로 딱 맞는 시간에 취급국에 도착하여 등기를 보낸 것이다. 등기를 보내기 전 사람들은 무얼 보내나 보았는데 누군가는 달력을 보내는 듯했고, 누군가는 내용증명을 보내는 듯했고, 또 누군가는 서류봉투 여러 개를 보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 눈에 띄는 노인이 있었다. 칠십 대(추정) 정도로 보이는 노인은 까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육필로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적힌 갈색의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봉투의 겉에는 빨간색 글씨로 <신춘문예 단편 소설 응모작>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바야흐로 신춘문예 시즌. 작년 조선일보 소설 부문 등단자가 육십 대 여성이었던가. 우체국에서 신춘문예 응모작을 부치려는 노인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보통의 신춘문예 응모작이라 함은 여지껏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글일 텐데, 저 노인이 들고 있는 서류봉투에는 어떠한 글이 담겨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나는 가끔 글을 쓰다가도, 요즘 내 글이 괜찮으려나 궁금할 때는 필력 테스트 삼아 익명의 문학 게시판에 글을 써오기도 했다. 글쟁이는 기본적으로 관종이라 글을 쓰고 누군가 글 잘 쓴다고 칭찬을 해주면 으쓱하고야 마는 유치한 족속이므로. 나는 가끔 날 모르는 이로부터 받아 드는 그런 댓글이 그리워져 익명의 게시판에 글을 써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지껏 책을 두 권 내었으니 작가 지망생 가득한 게시판에서 나도 모르게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는지, 이런저런 힌트를 던져주었고, 지난 여름날 어떤 이는 나에게 무슨무슨 출판사에서 무슨무슨 책 내신 분 아니냐는 댓글을 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말한 그분이 나놈이 맞았으므로, 아이고 망했네, 나는 더 이상 이곳에서 필력 테스트를 할 수 없겠구나 싶어져, 몇 달째 그 게시판엔 글을 못 쓰고 있다.


문학 게시판이라는 성격답게 신춘문예 시즌이 되니 이런저런 게시물들이 올라와서 눈팅을 하고 있으면 다들 나름으로 목말라하는 것이 느껴진다. 어쨌거나 내 정체는 누군가에게 탄로 났고 요즘 나는 다른 방법으로 필력 테스트를 삼을 만한 것을 찾고 있는 중이다. 책 작업은 차치하고 관종이라 어쩔 수가 없다.


12월 첫날.

사람 많은 우편 취급국에서.


신춘문예 응모작을 보내는 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 저 노인도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글솜씨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마저도 누군가로부터의 인정을 요구하고야 마는 것이 글쓰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새 정신이 아득해진다.


올해 신춘문예는 그 노인에게 나이스 타이밍이 될 수 있을까.


익명의 문학 게시판 이용자도. 이름 모를 노인도.

지극히 낮은 확률 속에 모두 자신의 글을 던지는 계절이다. 생각하면 이 계절은 몹시 외롭고도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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