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글쓰기에 재미를 느낀 것은 유니텔 PC통신 유머동호회 <하얀이와 반달눈>에서 활동을 하면서였다. 유니텔이 아니라 하이텔이나 천리안, 나우누리를 했다면 내 인생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PC통신에 몰두하여 살았다.
하반(하얀이와 반달눈)에서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시작에는 박망초 누나가 있었다. 박망초는 지숙 누나의 당시 필명(대화명)이었는데 자신의 성씨 박과 물망초의 망초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나는 그 덕에 물망초의 꽃말이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망초 누나는 당시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는 글을 썼는데, 이 사람 글을 더 보고 싶다, 이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 하는 생각에 누나가 활동하는 곳을 찾아 들어갔고, 그곳이 바로 '하반'이었다. 하반 사람들은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재밌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명랑하고 쾌활하고 따뜻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재미난 일이 생겨서 시트콤 같은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했다.
동호회답게 때가 되면 여기저기 놀러도 많이 다녔는데, 가끔은 하루나 이틀을 자고 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속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밤은 곧잘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몇몇 누나, 형들과 수안보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밤이 깊어지자, 세상 누구보다 밝았던 누나들은 하나 둘 울음을 터트리며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눈물은 웃음만큼이나 전염이 강해서, 그날 밤 모두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공감 능력이 부족했던 나는 울지 않았다.
아마 그때였던 거 같아. 아, 이 사람들 겉으로 밝고 재밌고 즐거워했던 게 다 방어기제였구나. 사실 속에서는 많이 문드러져 있었구나. 어쩌면 남들보다 더 우울하고 나약해서 부러 이런 유머 동호회에 와서 글을 읽고, 글을 쓰고 하는구나.
이 이야기는 데뷔작 소설 <작가님? 작가님!>에 아주 짧게 실렸다.
(훗날 나에게 글감이 떨어진다면 나는 내가 쓴 소설에 던져놓은 떡밥들을 끄집어내 확대 재생산할 것이다.)
아마 '하반'에서의 활동과 '수안보의 밤'이 나에게는 되게 큰 이미지로 남아서인지, 언젠가부터는 나도 우울한 일이 있으면 가끔은 부러 더 가면을 쓰고는 방어기제를 펼치는 것 같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하는 캔디가 된 기분이다. 근데 우울한 일이 있다고 우울하다고 글 쓰면 단순 수필이 되겠지만, 우울한 일을 즐겁게 표현하고 이겨내면 그건 예술로서의 승화 작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승화'라는 단어 자체에 '방어기제 중 하나'라는 뜻이 포함돼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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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PC통신이 몰락하면서 하반 사람들은 와해가 되었고, 나를 '하반'으로 인도했던 박망초 누나는 훗날 드라마 방송 작가가 되었다.
박지숙 작가.
최근 몇 년간 작품 활동이 없었는데 올해 TV 조선 <엉클>이라는 드라마로 복귀하는 듯.
나는 망초 누나를 잊지 않고 있는데 망초 누나도 나를 잊지 않고 있으려나. 망초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