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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가의 노랫말

<그대가 떠난다면>

by 이경


몇 해 전 뮤지션 윤종신은 트위터를 통해 글을 쓰는 사람이 작사가가 돼보려고 글을 보내주지만, 글과 노랫말을 쓰는 작업은 전혀 다른 영역임을 알렸다. 실제로 작사가는 멜로디에 어울리는 노랫말을 입히는 과정에서 음절 하나로 며칠을 고민하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 멜로디보단 리듬 위주의 음악과 후크송이 인기를 끌면서 이런 고민으로 고생하는 작사가는 조금 줄어들지 않았나 싶지만 말이다.



하지만 예외는 항상 있는 법. 적지 않은 문학가, 소설가, 글쟁이들이 노랫말을 쓰고 때로는 명작을 또 때로는 망작을 만들어 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가의 노랫말은 故이남이가 부른 <그대가 떠난다면>이다. 작가 박범신이 노랫말을 붙였다.



일곱 살쯤 TV에서 이남이를 처음 봤다. 그때는 좋고 나쁜 음악을 알 리 없던 시절. 벙거지 모자에 콧수염을 기른 이남이가 TV에서 <울고 싶어라>를 불렀다. 무대매너가 괴상했다. 가수라 하면 응당 똑바로 서서 얌전히 노래를 부르는 건 줄 알았는데 이남이는 바닥을 쓸면서 노래 불렀다. 거의 엎드리다시피 해서. 몸서리치면서. 정말 울듯하면서. 이남이가 가수인지 개그맨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일곱 살은 땡깡 피울 때 말고는 울고 싶은 게 없는 나이. 이남이가 왜 그렇게 목놓아 울고 싶어 했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신중현과 엽전들, 사랑과 평화 등 한국 음악사의 굵직한 락밴드에서 베이스를 치던 이남이는 사랑과 평화 시절 불렀던 <울고 싶어라>의 히트에 힘입어 솔로 앨범을 냈다. <그대가 떠난다면>은 이남이의 첫 솔로 앨범에 첫 트랙을 장식했다. 가사가 먼저 쓰였는지, 곡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뮤지션마다 곡, 가사의 순서는 달리 하는 법이니깐. (랩곡의 경우 90% 이상은 곡이 먼저 나오고 가사는 후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추측하기로 <그대가 떠난다면>은 가사가 먼저 나왔을 거라 생각된다. 박범신은 사랑과 평화 앨범에 그의 소설 [불의 나라]와 동명의 곡 가사를 쓴 적이 있는데 <불의 나라>와 <그대가 떠난다면>은 화자와 대상의 관계가 바뀐 내용의 가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곡을 비교하며 들으면 재미있다.



사랑과 평화 - <불의 나라> 작사 : 박범신

우리 함께 불의 나라로 가자

내 손길 단 한 번으로도
너의 눈동자엔 빛나는 불씨 일어나고
내 노래 단한소절로도
너의 온 가슴 황홀한 불꽃 된다
바람이여 불어라 눈물도 외로움도
미지의 시간으로 천둥처럼 나가자
궂은날도 푸른 날도 일으켜 세우고
불바람 우리 되어 신새벽 떠나가자


이남이 - <그대가 떠난다면> 작사 : 박범신

그대는 눈빛 하나로도 내 온 가슴 불 지피고

그대는 손끝 하나로도 내 온 핏줄 잠재운다
그대는 한마디 말로도 내 온 세월 다스리고
그대는 한 소절 노래로도 내 온 마음 잠재운다
그대가 떠난다면 떠나고 만다면
아무것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



나는 <불의 나라> 보다는 <그대가 떠난다면>을 좋아한다. 음수율이나 두운법 같은 머리 아픈 단어를 차치하고서라도 그저 이 짧은 여섯 줄의 가사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랫말인가.

눈빛 하나로, 손끝 하나로, 한마디 말로도 내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사람. 이남이가 노래한 '그대'는 연애 상대로 치면 신과 같은 존재다. 그런 그대가 내 곁을 떠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지.



박범신이 쓴 단 여섯 줄의 가사는 기성 작사가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훨씬 뛰어난 서정이 담겼다. <그대가 떠난다면>을 들으며 나도 이런 사랑을 하고 싶었다. 눈빛 하나로 가슴이 활활 불타오르고 손끝 하나로 내 화를 잠재워 줄 사랑. 한마디 말로 내 지나간 과거를 모두 다스릴 줄 아는 사랑. 박범신이 쓴 여섯 줄의 가사는 그렇게 내 가슴에 남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문학가 박범신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다. 베스트셀러 [은교]가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그는 젊은 독자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아청법'이 세간의 화두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그의 소설 [은교]를 두고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그가 성추문 사건에 휩싸였을 때다.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해 출간 예정이던 소설을 한동안 미루기도 했다.



여기서는 그 사건을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 나는 사건의 사실관계와 결과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건이 알려졌을 때 <그대가 떠난다면>을 떠올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노랫말을 쓴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심적으로 그를 지지했다. 내가 간직하고 있던 <그대가 떠난다면>의 아름다움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나의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남이의 솔로 앨범에는 박범신 외에 걸레스님으로 불리던 중광스님이 <참사랑>의 노랫말을 쓰기도 했다.

80년대 그때는 그랬단다. 이외수, 박범신, 중광스님, 이남이가 함께 어울리며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단다. 함께 모여 있는 이들을 상상만 해도 낭만이 뚝뚝 흘러넘친다.



중광스님과 이남이는 이미 오래전 귀천했다. 이제는 노 작가가 되어버린 이외수 선생은 암투병을 하며 화천군과 갈등을 빚는다. 박범신의 말년 역시 순탄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극락세계에 있을 故이남이는 옛 동료 들을 지켜보며 <울고 싶어라>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제야 이남이가 부르던 <울고 싶어라>를 조금 이해한다.



서두에 깔아 두었던 윤종신의 말처럼 문학가와 음악가는 먼 사이일지도 모르겠지만, 때로는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시나무>로 유명한 하덕규의 '시인과 촌장'은 서영은의 소설 [시인과 촌장]에서 따왔다.

(서영은의 [시인과 촌장]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소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는 음악이, 특히 재즈가 단골로 등장한다.


가끔씩 세상에 나오는 문학가의 노랫말이 반갑다. 잘 쓰인 노랫말은 단순한 가사가 아닌 한편의 詩처럼 다가온다. 박범신의 <그대가 떠난다면>이 딱 그렇다. 더 많은 문학가의 노랫말을 꿈꿔본다.


<그대가 떠난다면>처럼 아름다운 문학가의 노랫말을.


*글에 등장하는 음악 제목은 < > 소설 제목은 [ ]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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