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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관리하셔야죠?

사라지지 마 머리!

by 이경

둘째 돌을 앞둔 어느 날. 머리가 많이 자랐다. 아내가 빨리 머리 자르고 오라고 타박했다. 내가 타박네도 아니고 머리 가지고 타박받으면 서럽다.


구전동요 - <타박네>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 어드메 울고 가니

우리 엄마 무덤가에

젖 먹으러 찾아간다





중학교 때 서태지의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보고 조금이라도 머리를 길러보고 싶었다. 머리를 기를 순 없었지만 세상에 반항하고 싶은 나이. 동네 미용사 누나에게 말했다.


"머리를 조금 길러보고 싶은데 다듬어 주실래요?"


미용사는 내 머리를 쓰윽 보더니 말했다.


"얘. 곱슬은 머리 기르면 좀 추해"


그날 여지없이 미용사는 내 머리에 바리깡을 갖다 댔다. 곱슬도 보통 곱슬이 아니다. 억센 곱슬이라 미용실 바리깡도 많이 고장 냈다. 미용사는 말도 못 하고 바리깡을 탁탁 쳐보더니 한숨을 쉬기도 했다. 미안하고 서러웠다.






그 서러움을 성인이 되어서 풀었다. 방위산업체 들어가서 월급이란 걸 받고서는 머리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머리도 동네 미용실에서 안 하고 꼭 빠쑝의 동네 '이대' 앞에 가서 했다. 바리깡은 안 썼다. 지지고 볶았다. 1인 1미용사도 아니었다. 호일 파마를 하면 한꺼번에 미용사 서너 명이 내 머리를 만져주었다. 왕이 된 기분.


이대 앞 미용실에서 호일 파마를 하고는 홈페이지 포트폴리오로 올리겠다며 완성된 내 머리를 사진 찍기도 했다. 곱슬머리라고 무시받던 내 머리가 미용실 홍보에도 쓰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거, 이거 내 머리도 좀 쓸만한 거 아니야? 모델이 된 기분.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는 아예 밀고 다녔다. 5미리, 3미리, 1미리. 새파라니 깎은 머리통을 만져 보면 까실 까실한 그 느낌이 좋았다. 20대 중반에 백수가 되고서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1년 넘게 머리를 길렀다. 어깨까지 머리가 내려와서 묶고 다녔다. 예술가가 된 기분.





머리들.jpg 20대 초반 머리를 지지고 볶고 밀고 길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머리는 예의 평범한 곱슬머리가 됐다. 머리를 갖고 노는 재미가 없어졌다. 머리에 돈도 안 썼다. 이대 앞에 갈 일이 없어졌다. 남성 전용 미용실이라고 불리는 블루클럽, 나이스 가이 같은 동네 미용실만 다녔다.


둘째 돌을 앞두고 항상 가는 미용실 문이 닫혔다. 비슷한 남성 전용 미용실을 찾아 머리를 잘랐다. 미용사는 백발의 머리를 묶은 중년 남성이었는데 머리를 깔끔하게 잘라주었다. 미용사는 마지막으로 머리를 다듬어 주면서 내게 말했다.


"머리가 조금씩 빠지고 있는데 탈모 방지 샴푸를 써 보세요."


"?????"


충격이었다. 40대 남성은 돈 없고 배 나올지언정 머리숱만 많으면 성공한 사람이라지 않았던가? 30대 후반의 나는 충분히 성공하는 사람으로 살 줄 알았다. 40대를 2년 앞두고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젊은 시절 머리숱이 너무 많았다. 머리를 자를 때는 항상 머리숱을 쳤다. 그런데 미용사 양반. 탈모 방지 샴푸를 쓰라니 그 말이 진심이오? 스트레스를 줄여야 해. 스트레스. 스트레스가 내 머리를 앗아가고 있어.


얼마 전 백발의 중년 남성에게 내 머리를 또 맡겼다. 백발이던 그의 머리는 어느새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날은 아직 추웠는데 그의 머리 위에만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내게 탈모 방지 샴푸를 권하던 그는 이번에는 다른 권유를 했다.


"곱슬이잖아요? 머리 펴보신 적 있으세요?"


"네. 네. 어릴 때 몇 번"


"1자형으로 쭈욱 다 피지 말고 앞머리만 C자 형태로 한 번 펴보세요."


"네. 네. 나중에 한번 해볼게요."


"이미지 관리하셔야죠. 머리가 좀 지저분해요."


"....."


나는 시무룩해졌다. 집으로 돌아가 이미지 관리하라는 소릴 들었다고 하니 아내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미용사는 내 머리를 예쁘게 깎아주었지만 탈모와 이미지 관리 걱정을 던져주었다. 같은 날도 아닌 시간차 공격이었다.

머리가 없어도 고민, 있어도 고민이다. 머리가 많이 빠지면 아예 밀고 다니지 뭐. 그런데 정작 머리가 많이 빠지면 싫을 것 같다. 역시 답은 머리가 조금이라도 풍성(?)할 때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나?






한국에서는 대머리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것 같다. 유럽에서는 대머리 남성이 남자답고 정력적으로 보인다고 하던데. 대머리 뮤지션 중에 필 콜린스(Phil Collins)라는 양반이 있다. 밴드 제네시스(Genesis)에서 드럼을 뚜들기다가 솔로 싱어송라이터로도 큰 성공을 했다. 머리 벗겨진 뮤지션을 생각하면 항상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다. <Another Day In Paradise> , <Against All Odds> 같은 곡이 유명하다.


그의 솔로 앨범 자켓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머리가 벗겨진 그는 항상 그의 모습을 앨범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런데 얼굴을 다 드러내지 않고 살짝 약한 모습을 보인다. 강한 조명을 비춘다거나 이마 선까지만 얼굴을 드러낸다. 점점 사라지는 그의 머리만큼 앨범에서 그의 얼굴 지분은 점점 줄어든다. 필 콜린스에게 이마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앨범들.jpg 필 콜린스의 앨범 자켓들. 이마가 나오는 사진이 거의 없다.



여섯 번째 앨범에서는 몸 전체가 나오지만 고개를 돌렸다. 나머지 앨범에서는 머리가 거의 안 보인다. 그런 그가 2010년 솔로 8집 앨범에서 드디어 얼굴 전체가 드러난 자켓을 선보였다. 앨범 제목은 [Going Back]. 그 앨범 자켓은 이거다.





고잉백.jpg



으엌!! 음악 천재 필 콜린스도 되돌리고 싶었던 거야. 앨범 제목도 '고잉백' 이잖아. 이마를 가리며 앨범 자켓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던 필 콜린스가 드디어 얼굴을 드러낸 8번째 자켓은 유년의 풍성하던 머리숱을 자랑한다. 그동안 얼마나 서러웠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머리숱이 줄어드는 나는 필 콜린스의 기나긴 음악 여정을 되짚어보며 연민의 정을 느낀다.


고백한다. 미용사에게 '곱슬머리는 머리 기르면 추하다'는 타박을 받아도 좋으니 머리숱이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꼭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거다. 머리. 머리도 있을 때 잘하자.


부디,

사라지지 마! 머리!

빠지지 마!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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