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애가 서너 살쯤 됐을 때였다. 말을 보러 가고 싶었다. 말은 왠지 멋진 동물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운장의 애마 적토마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 갈기를 휘날리며 힘차게 내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하체 부실자인 나조차도 꿀벅지가 될 것만 같다.
서울 근교에서 내달리는 말을 보려면 과천 경마공원이나 원당 종마공원을 가야 한다. 우리 가족은 과천으로 가기로 했다. 과천 경마공원은 좋지 않았다. 홀로 가기엔 나름의 재미가 있는 곳일지 몰라도 아이를 데리고 가기엔 몹쓸 장소였다.
경마장 안쪽 바닥에는 도박중독으로 보이는 아재와 아지매들이 신문지를 깔고 도시락을 싸들고 와서 먹고 있었다. 곳곳에서 매캐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숨과 욕설이 오갔다. 어떤 사람들은 소리치며 울고 있었다. 아! 현실세계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겠구나. 누군가는 돈을 따서 기뻐했지만 대부분은 돈을 잃었다.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마권이 바닥에 가득했다.
그래도 왔으니 말이 달리는 모습은 한 번 보고 가자 했다. 한꺼번에 여러 마리의 말들이 트랙을 돌았다. 말들이 달릴수록 관객들의 함성도 커졌다. 이리 듣고 저리 들어도 욕이다. 그것도 쌍욕이다. 와이프는 담배 연기에 두통을 호소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경마장을 빠져나왔다.
큰 애가 대여섯 살쯤 됐을 때였다. 집 근처 광명에 경륜장이 있어 가보기로 했다. 경마와 경륜은 비슷해 보이기도 아닐 것 같기도 했다. 궁금했다. 내부에는 아이들을 위한 시설도 많다는 후기를 봤다. 집에서 경륜장까지는 차로 30분이면 충분했다.
실외 경마장과 달리 실내 돔구장인 경륜장은 깔끔한 느낌이었다. 베이지색 트랙 위에 사이클 타는 선수들이 나와서 몸을 풀었다. 경마장처럼 담배를 태우는 사람도 없었고 소리치는 사람도 없었다. 사이클을 모는 선수들은 한 마리의 말처럼 두꺼운 꿀벅지를 지니고 있었다.
본시합이 시작됐다. 트랙을 여러 바퀴 돌아야 한 시합이 끝나는 듯했다. 경기 초반 관객석은 조용했다. 선수들이 트랙을 몇 바퀴 돌고 본격적인 순위 싸움이 일어나자 관객석에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말하면 무얼 하나. 또 쌍욕이다.
"야 이 개새끼야. 빨리 달려! 밟어 어서!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이곳은 극한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구나 싶었나. 선수들은 자기 직업에 충실했다. 쉬지 않고 페달질을 하는데도 이렇게 욕먹는 게 당연시되는 직업이라니. 관객석에서 욕이 터져 나오자 아내는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경마장이나 경륜장이나 매한가지다. 아이들 데리고 두 번 다시 안 와야지 다짐했다.
국내 밴드 파라솔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다만 그들에게 아이는 없다. <경마장 다녀오는 길>이라는 곡에서 돈을 잃고선 다시는 경마장에 가지 않을 거라고 노래한다. 몽환적인 사운드에 취하는 곡이다. 나는 내달리는 말을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클 때 까지는 별 달리 선택할 게 없다. 동물원이나 가야 한다. 동물원의 말들은 달리지 않는다. 그저 여물을 씹어 먹으며 가끔씩 멀뚱멀뚱 사람들을 쳐다본다. 사람과 말들이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구경할 뿐이다.
파라솔 - 경마장 다녀오는 길 中
오늘도 같은 잠바에 늘 입던 바지를 입고
항상 같은 번호를 골라 혹시 하는 마음으로
어제 앉았던 자리엔 다른 사람의 등이 보이고
잠깐 고민하다가 다른 자리를 둘러보는데
시작 총소리가 울리고 트랙을 빙빙 도는 경주마들
어느새 경주는 끝나고 두 번 다시는 안 올 거라 다짐을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