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이나, 아무런 말이나.
1. 하늘에서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들이 내려온다. 늦은 점심 먹고 사무실에 들어오다가 흠뻑 젖었다.
2. 편집자는 남의 글을 보는 사람이지만, 자기 글을 쓰는 사람도 많다. 지금까지 네 권의 책을 작업하면서 만난 편집자들은 재밌게도 모두 책을 낸 경험이 있는 분들이다. 한 분은 공저의 소설을, 한 분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 교육서를, 한 분은 그림 에세이를 냈다. 편집자 분들의 책이 초대박이 나는 날, 무명 글쟁이 이경을 가리켜,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라고 홍보하고 싶다. 그러니 편집자님들, 힘을 내주셔요.
이런 저의 과거를 미루어보아 출간 경험이 있는 편집자 분들은 무명 글쟁이 이경을 주목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네?
3. 마스다 미리의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을 보면 편집자들은 대부분 좋은 대학 나오고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그들에겐 배울 게 많다고, 뭐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거 같다. 한 편집자에게 '구조주의'에 대해서 물어보고, 편집자가, 아 그것은 말이죠, 하면서 술술술술 설명을 해주는 장면. 마스다 미리가 구조주의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편집자들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알죠? 묻자, 편집자가 '대신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진 못하니까요.'라고 답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4. 한국도 일본 출판시장과 크게 다르진 않아서, 편집자 분들 보면 대부분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같이 책 작업하게 되면 많이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게 된다. 실제로 많이 배우기도 하고. 글 쓰는 편집자도 많으니까, 편집자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나보다 훨씬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쭈글쭈글한 생각도 자주 하게 되는데, 지나친 가방끈 콤플렉스처럼 보일까 봐 티를 막 내진 않는다.
5. '글쓰기의 목적은 여러분 부모님이 부끄러워서 졸도하게 만드는 데 있다.' 라는 J.P 돈리비의 명언을 좋아하는데, 편집자와 작가의 차이는 여기서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전문 글쟁이들은 부모님이 어찌 생각하든 부끄러움을 모르는 슈퍼 관종으로 살아가는 반면에, 출판 편집자 분들은 올바른 사회성을 가지고서 사회적 지위와 위치를 생각하며, 글쓰기 따위 자제하고 사는... 아님 말고.
6. 나 같은 쪼랩은 사소한 우연도 부풀려서 인연이라고 여기곤 한다. 첫 번째, 두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책의 편집자 이름은 모두 '영'이다. 마치 무명 글쟁이 이경의 출판 세계에는 '영'이라는 이름의 편집자만 존재하는 듯. 그러니 편집자 분들 중 자신의 이름이 '영'이다 하는 분들은 저를 주목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네?
7. 작년부터 최근까지도 비오의 <문득>을 자주 듣는데, 며칠 전부터 아들 1호도 비오의 <문득>을 듣기 시작했다. 아들과 동시대에 같은 곡을 듣고 좋아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미난 일.
비오의 <문득> 가사를 보고 있으면, 한 밴드의 음악이 떠오르는데 나중에 관련해서 떠들어봐야지. 그러니까 이건 까먹지 않고 음악 이야기를 하기 위한 메모용.
8. 오미크론의 전염력이 대단하긴 하다. 주변에서도 확진자가 하나둘 나온다.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 또 만나야 할 사람도 많은데, 어찌하다 보니 백신 미접종자의 삶을 살고 있다.
사람 암만 길게 살아봐야 100년인데, 그중 2년을 마스크 쓰고 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산다고 생각하니, 이거 정말 억울한 일 아닌가 싶다. 페스트 시대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마는.
9. 음악 에세이 원고를 쓰기 전에 출판사 대표님이 원고에 들어갈 음악 리스트를 좀 짜 봐줄 수 있겠느냐고 해서, 주말에 대강 메모를 해두었다. 샘플 원고를 보신 대표님왈, 지금까지의 리스트는 '숨어있는 명곡' 느낌이라, 전체 리스트를 한 번 보고 싶다, 였는데, 대강의 리스트를 짜 보니, 샘플 원고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아서 난감하다. 음악 에세이 자체만으로도 뭔가 '같이 한 번 망해봅시다.' 느낌인데, 알려지지 않은 곡들에 대해 떠들면 책이 팔릴까.
10. 과거에 잠깐 만났던 S는 채팅을 할 때, 그러니까 S와는 MSN 메신저를 이용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다.) 채팅창에서 'ㅋㅋㅋ'하고 쓰게 될 때면 실제로도 웃음이 빵 터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S의 환한 웃음을 떠올리면서도, 그 이야기를 자체를 믿을 수는 없었다.
아니, 정말 채팅창에 웃음을 표기할 때, 실제로도 그렇게 웃는다고? 그렇게 밝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글을 쓸 때, 웃음 이모티콘을 쓰든, 눈물 이모티콘을 쓰든, 얼굴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나는, 요즘 들어 더욱 무표정으로 글을 쓴다.
11. 주말에는 부천에 있는 만화 전문 서점을 갔다. 마스다 미리는 평생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할 자신이 없다고 했는데, 나는 평생 '부천역'과 '부평역'을 구분해 낼 자신이 없다.
훗날 부천역과 부평역을 구분한다손 치더라도, 부천역의 남부광장과 북부광장을 구분할 방법은 또 없어서 그냥 늘 헷갈리며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부천역의 한쪽은 영감님들이 많고, 한쪽은 젊은이들이 많은데 내가 찾는 광장은 아직까진 젊은이들이 많은 곳이다. 만화 전문 서점이 그쪽 방향에 있기 때문인데, 그야말로 만화의 순기능이 아닐 수 없다.
12. 브런치는 자신들의 플랫폼에 글을 쓰는 사람들을 가리켜 '브런치 작가'라고 말하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에 가까운지, 작가 지망생에 가까운지는 사람들 생각마다 다를 것이다. 브런치에서 주로 어떤 분들이 글을 잘 쓰고, 어떤 분들이 책을 내게 되는가, 보면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유독 많은 것 같다.
초딩 선생님도 많고, 고딩 선생님도 많고, 대학 교수님도 있고 그렇다.
특정 과목 선생님이라면 역시 국어 선생님들의 글이 안정적이다. 브런치에서 활동하는 선생님들의 글을 보면서 학창 시절의 국어 과목 선생님들을 생각하곤 한다. 내가 글이나 쓰고, 책이나 내니까 이런 선생님들하고 말을 섞지, 내가 언제 어디서 이런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글 쓰는 국어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으면 마치 편집자와 이야기 나누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13. 역시 나는 좋아요보다 댓글이 더 좋다. 특히나 내가 쓴 글에 장문의 댓글이 달리면, 그게 선플이든 악플이든 읽기 전부터 두근두근한다. 아니, 나를 위해서 이렇게나 길게 댓글을 달아주셨다고, 하면서.
인스타든, 브런치든, 페이스북이든, 이전에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네, 글 좀 재밌네?' 하면서 댓들을 달아주시면 가슴이 너무 뛰어서 심부담이 높아질 지경.
14. 다음 책 출간 예정일은 3월 3일이니까, 대선 투표 일주일 전이다. 출판사 대표님과 출간과 대선 일정에 따른 영향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았으나 '그딴 거 없다.'로 결론이 나왔다. 그러니까 결론인즉슨 책은 원래 안 팔리는 물건이기 때문에, 대통령을 뽑기 일주일 전이든, 대통령의 할아버지를 뽑기 일주일 전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
15. 3월 9일은 대선일이면서 아들 1호의 생일이기도 하다. 아들 1호는 한 달 전부터 자신의 생일을 기다리고 있다. 부모에게 '포켓몬 카드'를 사달라고 할 예정인 듯하다. 나는 "그날 대통령 뽑는 날이라서 너 생일잔치 못해줘, 내년에 해야 돼." 하고서 놀렸더니, 아들이 그런 게 어딨냐며 짜증을 냈다. 자신의 생일에 진심이네.
16. 구정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들 1호 2호가 받은 명절 용돈을 쓰러 마트에 갔는데, 포켓몬 카드가 다 팔리고 없었다. 처가 근처의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세 곳을 둘러봤지만 매한가지.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카드 수급이 어려워서, 1인당 1박스만 판매 중이다. 그 포켓몬 카드라는 것의 박스 하나 가격이 29,900원이라 부모의 등골은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천천히 비틀리고 있는 것이다.
포켓몬 카드 없애주는 공약을 내세우는 후보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아님)
17. 3월 9일은 노터리어스 비아이지의 기일이기도 하다. 책이 나오기 이틀 전부터 출간 당일까지 항상 듣는 몇 곡이 있다.
2PAC의 <Nothing To Lose>를 들으며, 으으으으 나는 잃을 게 없다... 생각하기도 하고,
Notorious B.I.G의 <Juicy>를 들으며, 뭔가 책이 잘되는 모습을 꿈꾸기도 하지만,
가장 자주 듣는 곡은 김광석의 <너에게>이다.
출간을 앞두고는 꼭 그렇게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기분이 들어서.
18. 주말에는 오랜만에 김광석의 앨범을 들었다. 누군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를 심하게 탓하는 날이 있다면, 김광석의 <기다려줘> 가사를 프린트해서 눈앞에서 팔랑팔랑 흔들며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제 이런 사람이 생긴다면 김광석의 노랫말 대신 다음 달에 나올 내 책을 보여줘야지.
19. 앞서 낸 책 세 권의 ISBN은 모두 '810'으로 끝났다. 810은 '한국문학' 그러니까 소설 혹은 에세이라고 볼 수 있을 테고, 나는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내든 모두 810으로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음 책의 ISBN은 어째서인지 '800'으로 끝난다.
800이라니. 이건 '문학 일반'을 가리키는 고유 번호로, 문학이론, 문장 작법, 수사학, 글쓰기, 논술 뭐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는데, 대표님 지금 한번 같이 망해보자는 건가요?라는 말씀은 못 드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출판사 대표님이 글쓰기 매대랑, 에세이 매대 중에 어디에 올라가면 좋겠냐고 물어보셔서, 마치 금도끼 은도끼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더 잘 팔리는 매대가 좋겠습니다."라는 아주 현명한 대답을 하였다.
20. 19는 불안해 보이니까 20으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