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 아무 말

by 이경


의식이 이끄는 대로 아무 말, 아무 말


1. 담달에 나올 책 출판사로부터 전자책 계약서가 왔다. 이전까지는 종이책만 냈는데, 이제 전자책도 낼 것이라고. 그러면서 시집 한 권도 같이 보내주었다.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시집을 선물 받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으로 나에게 시집을 보내준 이는 내 글을 좋아해 주는 독자님이었다. 첫 번째든, 두 번째든 글을 쓰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라 생각하니, 글을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2. "못 쓴 글을 보면 짜증이 날 테고, 잘 쓴 글을 보면 질투가 날 테니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오는 헤밍웨이의 대사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주인공이 헤밍웨이를 만나 자기가 쓴 소설을 봐줄 수 있느냐고 묻지만, 헤밍웨이는 이토록 매몰차게 거절한다. 말투도 하드보일드라능.


다음에 나올 책에는 '문인상경'(문인들은 서로 경멸한다)에 대한 글이 한 꼭지 있는데, 그 글을 풀면서 이 장면을 소개했다. 여기에 나오는 헤밍웨이의 대사가 문인상경을 대표하는 장면 같아서.


실제 헤밍웨이가 이런 말을 했는지, 또 성격이 이렇게나 직설적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안에서는 정말 좋아하는 장면이다. 아, 그러니까 제목은 아무 말이라고 써놨지만 보시다시피 이건 은근히 다음 책을 홍보하는 게시물입니다만.


3. 영화를 그리 즐겨보는 인간은 아닌지라 지금까지 낸 책에서 이야기하는 영화가 맨 똑같다.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와 작가 토마스 울프의 이야기를 그린 <지니어스>와 역시 글 쓰는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자주 언급해왔다. 그러니까 작가를 지망하던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 두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4. <미드나잇 인 파리>를 좋아하는 다른 이유를 꼽으라면 레아 세이두와 까를라 브루니의 등장도 있겠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을 통해 레아 세이두를 처음으로 보았는데, 영화를 보면서 빌런이 살아남아 이기기를 소망한 적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까를라 부르니는 영화 속에서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나오는데,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좋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우아하면서도 섹시하다. 까를라 부르니에겐 한 시간이라도 잔소리를 들을 수 있을 듯.


5. 나는 영화 속 헤밍웨이처럼 잘 쓴 글을 본다고 질투를 하진 않고, 못 쓴 글을 본다고 해서 짜증이 나진 않는다. 다만 편집자에 대한 질투가 있는 편이라서, 편집자 누군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며 아 그 사람 글 너무 좋다, 보면 눈물 난다, 하고 있으면 질투가 나서 속에서 부글부글 한다. 질투는 나의 힘.


하지만 편집자에겐 될 수 있는 한 정상인의 모습을 보여야 하므로 이러한 질투심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습니다. 네네.


6. 편집자 분들이 쓰는 글을 좋아하는데, 내가 본 최고는 글항아리 출판사 편집장인 이은혜 선생님이다. 언젠가 느낌표가 하나도 없는 책을 쓰고 싶은 소망이 있는데, 이은혜 선생님이 쓴 <읽는 직업>에는 느낌표가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가끔은 느낌표를 쓰고자 하는 욕구가 스멀스멀 오르기도 했을 텐데, 어쩜 이럴 수가 있었을까 싶어서 감탄하며 읽었다. 물론 책의 내용도 너무 좋았고.


7. 어제는 잠들기 전 이은혜 선생님이 나온 유튜브 방송을 봤다. 영화 평론가와 대담 형식의 방송이었는데, 어떤 저자가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이은혜 편집장님은 아무래도 여러 권을 함께 한 저자가 기억에 남는다는 답을 하셨다.


8.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은 브랜드가 다른,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편집자와 작업을 했다. 세 번째 책의 편집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계속 책을 내면 좋다고. 첫 책이 잘 안 되더라도, 또 책이 나오고 하면 독자들은, 이 사람 글에 뭔가가 있나? 하고서 호기심을 보일 거라고.


그러니 여러분도 저에게 호기심을 좀 보여주세요.


세 번째 책의 편집자님과는 한번 만나기로 했고, 다음에 나올 책의 편집자 분께서도, 이보게 이경, 책 하나 더 같이 할 생각 없는가, 하고서 넌지시 이야기를 주셔서, 책은 안 팔려도 내가 아주 개똥망의 글을 쓰진 않았구나 싶어서 위안을 삼고 있다.


나도 같이 작업한 편집자 분들에게 오래 기억에 남는 글쟁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책 하나 같이 더해보지 않겠냐는 편집자의 질문에는 웃으며 농담으로 넘겼다.


9. 72년생 페친 한 분께서, 82년생이나 62년생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호감이 간다는 글을 쓰셨다. 나는 82년생과 한 끗 차이이니 저도 좀 껴달라는 농을 쳤다. 아, 근데 사실 농이 아닙니다. 저에게도 호감을 좀 느껴주세요.


데뷔작 <작가님? 작가님!>은 한 작가 지망생이 우연히 알게 된 작가에게 띄우는 서간체의 소설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 이야기인데,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와 지망생이 딱 아홉 살 차이 난다. 그래서 책에서는 시인 기형도와 강석경의 일화도 써두었다. 기형도와 강석경이 딱 아홉의 차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왠지 9살 차이 나는 분들에게 호감을 느끼곤 한다. 내게 유일하게 문인상경의 태도가 아닌 온전하게 좋아할 수 있는 작가 한 사람을 꼽으라면 <작가님? 작가님!>에 등장하는 배지영 작가님이다.


최근에 아홉 살 차이 나는 분들 몇 분과 페친이 된 것 같은데, 별다른 이유 없이 9살 많은 누나들 짱짱.


10. 아홉은 어색하니까, 일단은 10번에서 마무리. 짝수 강박이 있다. 음악 들을 때나 TV를 볼 때 볼륨은 늘 짝수다. 하지만 5의 배수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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