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 두꺼운 책 포비아라서, 그렇다면 두꺼운 게 어느 정도냐 물으실 텐데, 글 쓴다는 놈 치고 굉장히 부끄럽기 그지없으나, 소설 기준 300p 넘으면 나는 두렵다, 300p 넘는 책의 완독 확률이란 게 기껏 해봐야 한 2% 정도 되지 않겠는가 싶은데 말이죠.
한마디로 독서가로서는 글러먹은 겁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러씨아, 네? 러씨아 문학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무슨 스키, 무슨 스키 하는 이름도 어렵고, 지명도 어렵고, 주제도, 소재도 뭔가 어렵다는 느낌에 아아, 나에게 러씨아 문학은 가당치도 않겠구나 싶었던 거죠.
그러다가 최근에 러씨아어 번역을 하시는 선생님 한분과 페친을 맺고서 이 선생님이 하는 유튜브 방송을 보고 있는데, 아니 어쩜, 선생님 목소리가 너무 좋으셔서 말이지요. 세상 관심 없던 러씨아 문학에 관심이 생겼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몇 주 전에는 서점에 들러 너무 두꺼운 러씨아 문학은 아직 어려울 것 같고, 그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사서 읽고 있는데, 소설 속 화자의 말투가, 네? 요즘 말로 하면 굉장히 킹받는 스타일이다, 여러분, 여러분, 하면서 글을 이끌어 나가는데, 뭔가 계속적으로다가 아아, 킹받는다, 근데근데, 이거 말투 글투 어디서 본 거 같다 싶은데, 어디서 보았는가 생각해보았더니, 저의 최신작 <작가의 목소리>의 글투가 이렇게 킹받는 글투가 아닌가...네?
<작가의 목소리> 시작하고 두 번째 등장하는 문장에 '여러분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말이지요. 편집자분께서, 처음 교정을 볼 때 '들'을 삭제하고 '여러분'으로 가도 되지 않겠느냐 제안을 주셨는데, 저는 그럴 수 없다, 이것은 의도적 만연체의 느낌으로다가, 네? 독자 여러분들을 킹받게 하기 위해서라도 '여러분들'로 포문을 열어야 한다, 네? 그래서, 결국은 '여러분들'을 살렸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 그렇다고 제가 한국의 도스토예프스키이다아아아, 하는 얘기는 아니고, 뭐 저는 무명글쟁이스키 정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출간 후에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리뷰를 읽어보면 글투에 대한 이야기가 되게 많은 것 같습니다. 무명글쟁이스키 글투 뭔가 중독적이고 재밌고, 독특하고, 술술 읽히고, 네? 사실 이거 여러분에게 제가 가스라이팅을 가하는 겁니다, 무명글쟁이스키 이경의 글은 술술 읽힌다 읽힌다, 가스라이팅을 가하면 저의 책을 실제로 처음 보시는 분들도, 어어어어, 이거이거 술술 읽히는 거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끔 만드는 네?
하지만 저의 글투는 원래 이렇지가 않고, 뭐랄까, 저는 사실 굉장히 진지하고 우울한 톤으로 글을 쓰던 사람인데 말이지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킹받는 글투로 책을 하나 쓰게 되었는데, 책 읽어주신 독자분들이 의외로 글투를 재밌어해 주셔서 저는 조금 고민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작가의 목소리>를 작업한 출판사 대표님에게, 아, 저, 그, 혹여나 제가 앞으로 쓰는 글도 계속 이런 글투가 되어버리면 어쩌지요, 하고 여쭈었는데요. 출판사 대표님 왈, 아니, 이경, 우리는 자네의 이런 글투가 아주 좋다네, 개성이 넘쳐, 다음 책도 이렇게 쓰는 게 괜찮을 것 같아, 하는 답을 주셔서.
흐음, 그렇습니까... 대답하며 기뻐해야 할지, 어찌해야 할지 전두엽에선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요.
무엇보다, 출판사 대표님도 방송 작가 출신이라 적잖이 글을 써오던 사람인데, "이런 글투로 글을 쓰는데 전혀 밉지 않은 건 글 써본 입장에서 부러울 정도라네."라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아 그렇지요. 저는 뭔가 미워하기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지요, 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킹받는 말투를 쓰더라도 뭔가 미워하기에는 애매하고 모호한 글투와 말투, 저는 이것이 '균제미'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아 그렇다고 제가 균제미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뭐 책을 읽어주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게 또, 결과적으로는 결국, 균제미를 이야기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은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