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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 책 투정

by 이경


1.

<난생처음 내 책>이든 <작가의 목소리>든 책 안에서 말하는 내 글쓰기 방식이라는 게 늘 그렇다. 회사 콤푸타 앞에서, 땡땡이치면서, 낮은 사회성을 가지고, 사람과 어울리기를 기피하며, 독고다이, 탁탁, 타다닥, 키보드를 두들기며... 글쓰기 혹은 책 쓰기라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이 그거 아닌가, 사람 상대하지 않고 망해도 혼자 망할 수 있는 일, 홀로 뒈져버리겠어, 홀로 독, 갈 go, 뒈질 다이, 독고다이. (아님)


물론 책을 내기 위해서 출판사에서는 나에게 큰돈을 투자하고, 또 편집자라는 사람을 상대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보통의 사회에서 인간 구실을 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직업에 비해서는 훨씬 혼자 있을 시간이 많아서, 그렇기에 외롭고도 아름다운 일이 글쓰기 아닌가, 탁탁, 타다닥.


가끔 글쓰기가 너무나 외로울 적, 글쓰기 모임, 영어로는 롸이팅 클럽, 그래 나도 그런 걸 한 번 해볼까나 생각해본 적 있으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패거리 문화를 돌아보면, 역시나 이 길은 홀로 갈 때가 가장 아름답다.


존경해마지않는 다자이 오사무 역시 이런 '패거리'에 대하여 '패거리에 대하여'라는 수필을 쓴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패거리, 그것은 동료끼리 서로 등쳐먹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자신의 패거리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우울하게 만들 씨앗이라는 것, 우정, 신뢰 나는 그따위 것들을 패거리 안에서 본 적이 없다는 것. 그야말로 명문이 아닐 수 없다.


가끔 글쓰기 모임에서 합평을 하는 상상을 한다. 누군가 나의 글을 칭찬해준다면, 나는 금세 어깨가 빵빵해져서는, 허허, 감사합니다, 어쩜 저의 의도를 그리 잘 알아채셨는지, 제가 숨겨놓은 메타포를 알아보셨군요, 대단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하며 냄새나는 알랑방구 똥방구를 끼고서는, 자화자찬, 자만심에 차오를지 모른다.


반면 누군가 나의 글을 욕보이는 자가 있다면, 포커페이스라는 게 전연 없는 나로서는,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아, 죄송합니다만, 제가 아침에 혈압약 먹는 걸 깜박 잊어서, 하는 구라를 쳐놓고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쥐고서, 부들부들, 아, 생각만 해도, 열 받는군.


어쨌든 성격이 이러하니, 나는 합평의 경험이 없을뿐더러, 글 쓰는 이들의 패거리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의 목소리>에는... 아, 그러니까, 이거는 <작가의 목소리> 홍보글밖에 더 되겠습니까마는, 여하튼 <작가의 목소리>에서 나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첫 책을 '공저'로 내지 말라고 말했다.


이미 '공저'로 책을 낸 누군가는, 이경 저 자식이 나의 삶을 무시하고 있다, 하며 내 배때기를 쑤실 상상을 할지 모르겠지만, 공저라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이, 패거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나보다 잘 쓰는 놈과 붙으면, 내가 후달리고, 나보다 못쓰는 놈과 붙으면 내가 짜증 날 테니까. 아, 사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러는 것은 결코 아니고요.


많은 책 쓰기 아카데미에서는 수강생들을 모아다가, 여러분, 책 쓰기, 그거 졸라 어려운데, 한 두 꼭지씩만 쓰시고들, 공저로다가 책을 냅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순식간에 작가 지망생에서 작가가 되는 겁니다, 물론 제가 잘 가르쳐서 그런 건데요, 하는 영업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집단에 의한 자비출판이자, 기억되지 않을 패거리를 만들어내는 것뿐, 결코 작가가 되는 지름길이 아니다.


물론 누군가의 생각으로는, 이경, 사회성이 결여된 저 놈은 제 자신을 저런 식으로 합리화하는군,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생각이, 맞습니다. 네네.



2.

글쓰기 코치, 책 쓰기 코치, 여하튼 몇몇 코치코치들을 보면 지금껏 살며, 살아가며, 책을 만 권을 읽었다고 자랑하는 이가 있다.


가방끈이 짧은 나도 1년이 365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루에 한 권씩의 책을 읽는다고 쳐도, 만 권을 읽기 위해서는 만일이 필요. 이승환의 <천일동안>을 들을 때도, 천일이라니, 몹시 길군, 길게도 사랑했군, 생각했던 나는, 만일이라는 것이 와닿지 않는다.


이제 일만을 삼백육십오로 나누어보자. 만일을 채우기 위해서는 27년이 넘게 걸린다. 10살의 나이에 시작하였어도 하루 한 권, 만 권을 읽기 위해서는 37세가 되어서야 가능한 일. 그런데 책 만 권 읽었다는 코치 가라사대, 하루 한 권이 아니고, 3년에 만 권이라 하였던가, 넉넉히 1년 400일로 치고, 3년이면 1,200일.


계산기를 뚜드려본 결과 3년 동안 일만 권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하루 8권 이상이다. 양심이 있다면야 분명하게도 정독, 완독은 아닐 테고, 발췌독을 해야만 이렇게 읽을 수 있겠지. 아니면, 표지만 읽었을까?

그래, 십분 양보하여 만 권의 책을 읽었다고 치고서, 만 권의 책을 읽은 자가 왜 글쓰기 코치 같은 걸 하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당연히 독서 코치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종이책 촤르르르르륵 펼쳐가며 눈으로 쓱쓱쓱 보며, "다 읽었습니다." 하는 초능력 속독 학원, 뭐 그런 거 가끔 밈으로 보이더만.


3.

오늘은 서점에 들러 에세이 신간 매대를 보았는데, 두 명의 저자가 쓴 에세이가 새로 나와 살펴보았다. 그런데 책의 표지에 붙은 저자 이름 크기가 10포인트 정도였다면, 그 아래에 추천사를 쓴 사람의 이름 크기가 대략 15포인트 정도였던 것.


흐음, 저자 이름보다 큰 추천인의 이름이라니. 저자로서는 서운하겠는 걸, 생각하고서 책을 만지작거려보니, 당연히 띠지라고 생각했던 추천사의 내용이 표지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책 표지 자체에 저자의 이름보다 추천인의 이름이 크게 박힌 책이었던 것. 이것은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아닌가.


내가 그 책의 저자였다면, 편집자와 소주 한잔 나누며, 편집자님, 제가 무명이라 부끄러우세요? 라며, 울어댔을 것.

그리고 조금 더 취해서는, 아, 내가 오늘 아침 혈압약 먹는 걸 깜빡해서는, 하며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부들부들 거리며...



4.

꼭 내 책 이야기는 아니고, SNS에 떠도는 서평 게시물을 보았을 때의 느끼는 점.


누군가 이 책은 이렇더라, 하고서 책에 대해서 떠들어대면, 거기에 따른 댓글로 책을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서평을 쓴 글쓴이에 대해 떠들어댄다는 것.


어쩜 글을 이렇게 잘 쓰세요, 하는 칭찬부터,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소통해요, 어쩌고 저쩌고 따위의 책과는 무관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다.

이것은 서평을 쓴 글쓴이의 문제인가, 책의 문제인가, 서평을 읽은 독자의 문제인가, 하는 고민을 오랫동안 나는 해왔지만 이렇다 할 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서평을 쓴 이가, 지금 책이라는 달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면, 다들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손가락만 보고 있는 모습이랄까. 손가락이 참 곱고 기시네요, 섬섬옥수, 피아노를 치시나요? 오, 뷰리풀 핑거, 뭐 이러면서, 새로운 패거리를 만들어내고...


언젠가 글을 하나 읽은 적이 있다.

무명의 글쟁이가 작가로서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내 글을 믿고 읽어줄 몇몇의 독자, 능력 있는 편집자 하나, 그리고 내 책을 이야기해줄 서평가 세 사람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운이 좋게도 나는 첫 책을 내면서, 믿고 읽어줄 독자와 능력 있는 편집자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서평. 이 서평을 보고 있노라면 다들 그렇게 서평가의 손가락만 보고 있으니, 나로서는... 칭얼칭얼, 징징, 주절주절...


졸려서 떠들어 보는 책 투정입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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