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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Mar 23. 2018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내가 H를 알게 된 것은 스무 살 그즈음이었다. H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지만 우리는 친구처럼 지냈다. 아니, 친구보다 더 가깝게 붙어살았다. 서로 애인이 없을 때는 거의 매일을 함께 했다. PC방, 노래방 등을 돌아다니며 주말에는 같이 밤을 새기도 했다. 둘 중 한 사람에게 애인이 생기면 축하해주면서도 같이 어울리는 시간이 줄어들어 아쉬워하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를 소울메이트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 곁에 H는 없지만 그때는 그랬다. 




어느 날 H가 내게 돈을 좀 달라고 했다. 빌려달라는 말도 아니었고 아예 달라고 했다. 그 시절 나는 방위산업체에 다니며 월급이란 걸 받았고 H는 학생이었다. 둘이 만나면 밥값이며 노는 돈은 내가 다 썼는데 또 무슨 돈이 필요한 걸까. H가 내게 달라는 돈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액수였다. 돈의 사용처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고 줬다. 이유가 있겠지. 이유가 분명 있겠지.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나는 H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때 나한테 돈 달라고 한 거 있잖아. 그거 어디에 썼는지 물어봐도 돼?"


"아는 여자애가 있는데 임신했다. 아끼는 동생이야. 애 지운다고 울고불고하는데 집에는 말도 못 하고 징징거리잖아. 그래서 형한테 받아서 줬어. 말 못 해서 미안해."


"그때는 왜 말 안 했는데?"


"말했으면 형이 줬겠어? 내가 아는 형이라면 한참을 고민했을 걸?"


"남자애는 뭐 했는데?"


"몰라. 그 새끼는 뭐하는 새낀지. 그냥 싸지르고 나몰라라 했나 봐"



낙태(임신중절). 낙태라는 단어를 간접적으로나마 처음 접하는 상황이었다. H와 대화를 하는데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준 돈으로 한 생명이 꽃피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내가 잘 한 건가? 그때 나와 H는 20대 초반이었으니, H의 아는 여자애는 막 10대를 벗어났을 시기였겠다. 혹은 10대였거나. 그때 그 여자애가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았더라면. 그 아이는 스물이 다 됐을 텐데. H의 말대로 돈의 사용처를 알았더라면 나는 쉽사리 그 돈을 주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했을 테다. 



남자는 평생을 살아도 여자의 삶을 이해 못 할 거다. 낙태 같은 민감한 사안은 더욱 그렇다. 과연 무엇이 옳은 걸까. 낙태를 설명하는 데는 많은 단어들이 자석처럼 들러붙는다. 여성의 자주권, 도덕심, 불법, 종교적 강요, 구시대의 남아선호, 생명의 소중함, 책임과 회피, 미혼모 그리고 현실. 나는 모르겠다. 낙태죄 폐지 주장을 두고 오가는 말들 사이에서도 나는 어느 것이 옳은지 답을 낼 수 없다. 사람마다 각자의 사정이 다를 텐데. 옳은 답이 있긴 한 걸까?



낙태를 두고 수치화시킨 기사를 가끔 접한다. 1년에 몇 건의 낙태 수술이 일어난다던가, 미혼 여성 몇 명 중에 몇 프로는 낙태 경험이 있다더라 하는 자극적인 기사를 보면 생각보다 높은 수치에 놀라워하기도 한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당장 내가 알고 지내는 몇몇의 여성 중 원치 않던 임신을 경험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 한쪽에서 생겨난다. 



어릴 때 산부인과에서 일하던 한 간호사의 글을 봤다. 낙태가 이루어지는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적나라하게 적은 글이었다. 글에는 주사, 메스 같은 수술용 기구와 붉은 선혈이 낭자했다. 피를 빨아들이는 호스가 나왔다. 그 사이 '생명'이라는 단어가 몹시 눈에 밟혔다. 나는 그 글을 차마 다 읽을 수 없었다. 글을 읽는 그 시간 내내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다이나믹 듀오 3집에는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이라는 곡이 있다. 


'가을'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클럽에서 한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원치 않던 아이가 생겨 아이를 지우는 과정을 그렸다. 국내 힙합 트랙 중에선 보기 드물게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고,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등 스토리텔링의 힘이 큰 곡이다. 


다이나믹 듀오의 래퍼 개코와 최자가 각각 3인칭의 시선으로 남, 녀의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바비 킴(Bobby Kim)이 싱어로 후렴구에 참여했다.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가사, 찰진 랩과 구성. 음악만 놓고 본다면 빠질 만한 구석이 없는 훌륭한 곡이다. 쓸쓸한 가을에 찾아 듣는 좋은 곡이다.


다만, 이 곡을 들을 때면 20여 년 전의 일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H에게 건네주었던 돈. 

그 돈은 올바르게 쓰인 걸까.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을 모르는 나는 알 수 없다. 


그 남자, 그 여자. 그리고 지워진 한 아이의 사정을.


다이나믹 듀오 3집.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이 실렸다.



다이나믹 듀오 -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中


(개코)

불쑥 그녀가 꺼내 내미는 임신 테스트기에는

얇지만 선명히 그어진 두 개의 선
그 순간부터 그는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떨어
`내가 미쳤지`를 속으로 반복하며 담배를 털어
그깟 게 대수냐 애 때면 되지 뭐
근데 평생 떼지 못할 죄책감은 어떡해


(최자)

이제 그들은 돌아가려고 해 자기가 있던 곳에
수정은 못해 각자 짜두었던 인생의 일정표에
수술 전 날 밤 꿈속을 헤맬 때
그녀는 그녀를 꼭 닮은 한 아이와 마주치네


(바비 킴)                  

요즘 꿈만 꾸면 그 애를 봐
내 뱃속에서 날 보며 헤엄을 치지
어딘가 나를 좀 닮아서
잠드는 게 두려워
오. 난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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