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 Jan 04. 2019

밤 눈

월전 장우성 <눈>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그 유명한 도입부다. 온통 새하얀 눈의 고장을 정말 아름답게 표현한 소설이다. [설국]에서 묘사한 눈의 풍경도 좋아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곡이 있다.

송창식의 <밤 눈>이다. 


송창식의 <밤 눈>은 작가 최인호가 가사를 썼다는 얘기도 있고, 그의 동생 최영호가 가사를 썼다는 얘기도 있다. 둘 중 한 사람이 모티브를 제공했고 나머지 한 사람이 가사를 썼다는 얘기도 있다. 누가 썼든 간에 내게는 가사나 보컬 모두 소설 [설국] 못지않게 아름다운 곡이다.

 

IMF 시절 가세가 기울고 집을 팔아야 했다. 월세를 전전하며 몇 번의 이사를 하고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부모님은 구파발역 근처에 새집을 장만하셨다. 지금이야 구파발역 앞에 가면 쇼핑몰을 포함한 마천루가 들어섰지만, 새집을 장만할 당시만 해도 구파발역 근처는 허허벌판이었다.

 

구파발역에서 집까지 걸어가기엔 조금 애매한 거리였다. 마을버스가 다녔지만 이른 시간 운행을 멈췄다. 회사가 늦게 끝나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터벅터벅 그 먼 길을 걸어야 했다. 어두컴컴한 허허벌판의 그 길을.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인적도 드물었다. 달과 별 아래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다.


가끔 음악을 들을 때 음악 속 풍경이 현실 세계에서 펼쳐질 때가 있다. 참 묘하고 신기한 경험이다. 내겐 송창식이 부른 <밤 눈>이 그랬다. 추운 겨울. 어둠이 내려 온통 새까만 하늘의 시간. 지하철 구파발역에 내려 보니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어찌나 많은 눈이 왔던지 발목까지 눈에 덮였다.


뽀드득 뽀드득.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 그때 귀에서는 송창식의 <밤 눈>이 흐르고 있었다.


터벅터벅

뽀드득 뽀드득.


세상에 나 홀로 있는 듯한 기분.


송창식의 <밤 눈>이 너무 아름다워서였을까.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과 새까만 하늘이 아름다워서였을까.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나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던 밤길이었다. 밤의 밑바닥을 하얗게 만든, 아름다운 밤 눈.



송창식 <밤 눈>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가만히 눈감고 귀 기울이면

까마득히 먼 데서 눈 맞는 소리

흰 벌판 언덕에 눈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못 듣는가? 저 흐느낌 소릴

흰 벌판 언덕에 내 우는 소릴

잠만 들면 나는 거기엘 가네

눈송이 어지러운 거기엘 가네

눈발을 흩이고 옛 얘길 꺼내

아직 얼지 않았거덩 들고 오리다

아니면 다시는 오지도 않지

한밤중에 눈이 나리네 소리도 없이

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