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 속담이라는데, 나는 무언가가 자라기 위해선 주변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런 도움과 성장의 관계가 꼭 아이를 키우는 데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저 친구 사이였던 둘 사이가 연인으로 발전하는 데에 누군가의 도움이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
첫사랑이었던 J와 연인이 되기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열심히 썸을 타던 그 어느 날, 같이 밥을 먹기로 했는데 장소가 동숭로였다. 동숭로. 혜화역 대학로의 거리. 살다 보면 문득 예술가의 기운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나는 홍대나 파주, 혜화를 찾곤 했다. 홍대에서는 음악 예술인의 기운을, 파주는 미술과 출판 예술인의 기운을, 혜화는 많은 연극 예술인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혜화동이든 대학로이든 동숭로이든,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이곳에서의 많은 추억이 있다.
이제는 거의 사라졌지만, ‘민들레영토’라는 예쁜 이름의 카페를 기억한다. 혜화에도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에도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카페였다. 이곳에서는 찻값이 아닌 문화비라는 걸 내면 얼마간의 시간 동안 차를 마시면서 머무를 수 있었다. 민들레영토에서 많은 청춘들은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대화를 하고, 사랑을 나누었다.
소문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민들레영토의 알바는 외모를 보고 뽑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민들레영토에서 일하던 누나들은 예뻤고, 형들은 잘생겼었다. 친구 사이이던 J와 혜화동에 갔던 날, 민들레영토에서 아는 누나가 일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곳에 들렀다. 누나는 카페에 들어선 나를 알아보고, 내 옆에 있던 사람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두 분이세요? 사이좋은 연인석 괜찮으세요?"
사이좋은 연인석이라는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J와 나는 서로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누나의 이끌림에 사이좋은 연인석을 안내받았다. 둘이서 마주 보고 앉는 자리가 아닌, 옆에 붙어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다. 누나의 도움으로 나와 J는 분명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겠지. J와 함께했던 동숭로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이처럼 설레고 아름답다.
J의 어깨에 처음 손을 올렸던 날도 동숭로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박화요비의 콘서트에서였다. 그때 박화요비의 공연이 어땠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순간의 어렴풋한 기억들. 게스트로는 소찬휘가 나왔었는데. 당시의 박화요비는 이제 화요비라는 좀 더 간결해진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있고, TV에서 보는 소찬휘는 조금 나이가 들은 것 같아. 아마. 아마, 우리도 그렇겠지. 화요비의 공연이 끝나고, 어깨에 손을 올린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추울까 봐.”라는 짧은 답을 했고, J는 그 짧은 대답에 웃음으로 보답해주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동숭로에서의 기억은 대체로 아름답게 남아있다.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과 탐 크루즈(Tom Cruise)가 주연한 영화 [레인 맨(Rain Man)]이 대학로의 연극으로 만들어진 적이 있다. 자폐증을 가진 형과 그가 물려받은 유산을 노리는 동생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내용의 명작. 대학로에서는 임원희가 형의 역할을, 이종혁이 동생 역할을 맡았었는데, 지금의 아내와 대학로에서 이 연극을 함께 보기도 했다.
오래전 어느 날은 도올 김용옥 교수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길거리 강연을 하기도 했다. TV에서 보던 유명인사가 침 튀겨가며 행인에게 철학을 논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그의 길거리 강연을 경청하기도 했다. 그 특유의 말투는 TV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역시나 마로니에 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을 웃겨주었던 누군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즐겁고 아름답기만 하던 기억들은 세월 속에서 그렇게 점차 산화되어 가기도 한다.
장소와 공간을 노래한 많은 곡이 있지만, 특히나 마로니에가 부른 <동숭로에서>를 사랑한다. 내게는 많은 추억이 깃든 장소이니까. 마로니에가 부른 <동숭로에서>처럼 이 길 위에서는 자유가 느껴진다. 낭만이 느껴진다. 청춘과 사랑이 느껴진다. <동숭로에서>의 메인 보컬 신윤미와 권인하는 그 어느 시절보다 이 곡을 부를 때가 아름답다.
요즘 인터넷에서 권인하의 창법을 보고 '천둥 호랑이' 창법이라고 부르는 걸 봤다. 불호령을 내리듯 커다란 성량으로 무섭게 노래하는 권인하의 창법을 약간은 희화한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동숭로에서>를 부를 때의 권인하는 아름답다. 자유롭고 낭만적이다.
신윤미는 국내 음악사에 있었던 묘한 사건의 장본인이다. 한국판 *밀리 바닐리 사건이라고 할 만한 립싱크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신윤미다. 그녀가 최초 레코딩 했던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은 적지 않은 인기를 끌었다. 신윤미는 이 곡을 녹음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는데, 소속사는 신윤미를 대신할 새로운 멤버를 뽑았고 그녀들은 신윤미 파트를 립싱크 했다. 립싱크가 흔하던 시절이었지만, 다른 이의 목소리를 립싱크 한 사건은 드문 일이었다.
*(80년대 후반 큰 인기를 끌었던 남성 듀오. 실제 노래했던 이가 아닌 두 사람이 립싱크로 활동했다.)
<칵테일 사랑>의 보컬과 코러스, 편곡에 참여했던 신윤미는 후에 소속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승소했다. 당시 신윤미를 변호했던 변호사의 이름이 익숙하다. 이름이 박원순 이라던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장소이든. 그게 첫사랑과 관련된 것이든, 아니든. 추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늘 아름다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