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산업체로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공단 근처에 있던 한 레코드 가게에서 휘성 1집 앨범을 샀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음반 시장이 호황기였으니, 음반점엔 판매용이 아닌 프로모션용 비매품 음반도 심심찮게 뿌려지곤 했다.
마침 내가 휘성 앨범을 사러 가게에 들렀을 때는 휘성 앨범이 모두 팔린 상태였다. 가게 사장님은 "이거라도 가져가실래요?" 하면서 나에게 비매품 홍보용 음반을 팔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Not For Sale'이 찍힌 휘성 앨범을 돈 주고 사게 되었으니, 나름의 희귀템이라면 희귀템이랄까. 뭐 홍보용 음반을 얼마나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난 게 휘성 1집의 경우 프로모션용 음반과 정식 발매 음반의 트랙리스트가 다르다. 단 한 곡만을 발매하는 디지털 싱글이 아닌 이상, 정규 앨범에서는 유기성이나 통일감, 균형감 등을 따지며 트랙리스트에서도 고심하며 공을 들이게 된다.
당시 휘성의 레이블이었던 YG 산하의 엠보트에서도 이런 고민이 있었는지, 프로모션용과 정식 앨범에서의 트랙리스트가 상당수 뒤틀려있다.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난 당연히 두 음반 사이의 트랙리스트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정식 앨범의 트랙리스트를 따로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인트로를 제하고, 홍보용 음반의 첫 트랙은 <떠나>인데, 정식 음반에서는 <...안 되나요...>인 식이라서 뒤늦게 정식 트랙 순서를 보고는 조금 충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 보통은 타이틀 곡을 앨범 앞부분에 배치하곤 했으니, 마지막까지 <떠나>가 <...안 되나요...>와 타이틀 경쟁을 펼쳤던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여하튼 나는 줄곧 휘성의 앨범을 처음 플레이했을 때 <...안 되나요...>가 아닌 <떠나>를 먼저 들은 탓인지, 휘성 1집에서 가장 큰 이미지를 차지하는 곡은 <떠나>가 되어버렸다. 대중적인 <...안 되나요...>와 달리 <떠나>는 좀 더 알앤비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트랙이란 점도 그렇고, 무엇보다 <떠나>의 도입부가 무척이나 강렬하였으므로.
이처럼 앨범의 트랙 순서에 따라 한 가수의 느낌이 달라지기도 한다. 앨범에서 <...안 되나요...>를 먼저 들었을 사람과 <떠나>를 먼저 들은 사람의 느낌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분명 다를 것.
요즘 들어 '시절인연'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앨범의 트랙리스트 순서가 중요하듯 어느 시기에 누군가를 알게 되고 만나는 것에도 어떤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가끔은 남들과 달리 틀어진 순서의 음반을 들을 일도 생기고. 그러니까 요즘 알게 된 누군가를 아주 오래전에 만났더라면 어떠했을까, 그 옛날에 만났던 누군가를 요즘에 알게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 뭐 조금은 부질없는 생각이라 하더라도.
휘성 1집의 타이틀은 영화처럼을 뜻하는 [LIKE A MOVIE]. 모든 곡에 영화 제목을 부제로 달았다. <떠나>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이고, <...안 되나요...>는 [화양연화]이다. 장만옥과 양조위가 주연한 영화 [화양연화]가 나름의 시절인연을 그린 것이라 생각하니, 내가 가지고 있는 앨범 [LIKE A MOVIE]의 틀어진 트랙리스트가 좀 더 재밌게 느껴진다.
휘성 1집에서는 <아직도..>도 즐겨 듣는다. <아직도..>의 부제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 해피 투게더>인 탓에 이 곡을 들을 때면 꼭 동성애 커플의 그림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떠오름과는 별개로, 제발 떠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멀리 떠날까 봐 아무 말 못 한 채로 있다는 화자의 마음이 참 애절하게 느껴져서 좋아하는 곡이다. 떠나지 말라고 말하면 더 멀리 떠날까 봐, 말하지 못했던 사람이 내게도 분명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