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인정을 기다리는 일

by 이경



학연, 지연, 혈연 이런저런 연들 중에 딱히 의지하지도 또 기대하지도 않는 게 있다면 단연 학연이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살갑게 지낸다는 게 정서적으로 이해가 안 가기도 고 무엇보다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다 보니 딱히 알고 지내는 학교 선후배도 거의 없다. 친구도 많이 없는 인간이 선후배가 있을 리가. 몇 년 전 술자리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그리 친하지 않았던 고교 동창을 만났는데 그는 여의도의 증권맨이 되어 있었다. 녀석은 불콰해진 얼굴로 대뜸 자기 테이블의 누군가를 소개해주었다.


"인사해, 나랑 같은 회사에 계시는 분인데 우리 고등학교 선배님이셔."


내가 언제 선배 소개해달랬나. 당황스러운 마음에 엉거주춤하고 있었더니, 얼굴 한번 못 보고 자란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학교 선밴데 말 놔도 되지?"


'안 되는데요, 이 새끼야. 언제 봤다고.' 하는 마음의 소리를 밝히진 못하고, 어이쿠 네네 그럼요 그럼요 해버렸다. 비굴한 인간 같으니. 근데 진짜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주제에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놓는 그 인성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말 놓던가. 그렇게도 선배 대접을 받고 싶은 걸까.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욕구들. 그러니까 식욕, 수면욕, 성욕 같은 기본적인 욕구만큼이나 사람의 인정 욕구는 강한 것 같다. 그리고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 역시, 어쩌면 인정 욕구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자기 자신이 인정할 수 있을 만한 글을 써내야 하고, 그 후에는 글을 책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편집자의 인정을 기다려야 하고, 책이 된 후에는 불특정 다수로 이루어진 독자의 인정을 기다리게 된다.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마치 혹독하고 추운 겨울을 버텨내는 일처럼 느껴진다. 봄은 까마득히 멀고 멀어 어쩌면 영원토록 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특히 글을 쓰고 출판사에 투고했던 시간은 오로지 편집자 단 한 사람의 인정을 기다리는 일과도 같다. 수십수백의 출판사에서 거절하더라도 단 한 사람의 편집자만 설득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작가 지망생이라는 무거운 딱지를 떼어 낼 수 있겠지만, 그 한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무척이나 요원하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대중이 없을 때 예술가는 슬픈 법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런 상황을 상상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이 차오른다.


들어주는 사람 없는 노래를 부르는 이.

보아주는 사람 없는 그림을 그리는 이.

그리고 읽어주는 사람 없는 글을 쓰는 세상의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


그 모두가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이윤찬이 부른 <겨우살이>(봄을 바란다)는 이런 예술가의 혹독한 모습을 노래한다. 들어주는 이가 없더라도, 언젠가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노래하겠노라고. 겨울과 봄 사이에 지고 피는 겨우살이에 빗댄 이 곡을 들으면서 나 역시 오랜 시간 누군가의 인정을 기다렸다. 단출한 악기 구성에, 이윤찬의 목소리 하나로 밀고 나가는 곡에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큰 감동을 느꼈다. 예나 지금이나, 내게는 눈물 버튼과도 같은 곡이다


이윤찬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은 건 김현식 사후 20주기에 발표된 트리뷰트 앨범을 통해서였다. 당시 '더딥송(The Deep Song)'이라는 밴드가 김현식의 <사랑할 수 없어>를 불렀는데, 정제되지 않은 보컬의 거친 목소리가 무척이나 인상 적이었다. 약간 술에 취해 부르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고. 그 밴드 더딥송의 보컬이 바로 이윤찬이었다.


그 후 더딥송은 밴드명을 '24일'로 바꾸기도 했고, 이윤찬은 '데이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더딥송, 24일, 데이먼, 이윤찬 그 모두가 나에게는 한 사람의 목소리로 인식되어 있다. 이윤찬은 이런저런 영화나 드라마 OST에 참여하며 꾸준히 노래하기도 하지만, 또 가끔은 활동이 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소식이 궁금했던 어느 날은 페이스북에서 그의 이름을 쳐보았다가, 놀라기도 했다. 그가 나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작가 지망생 시절,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겨우살이>를 불렀던 이가 고등학교 선배였다니. 이윤찬이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게 어쩐지 좋기도 했다. 아, 그래. 이 정도라면 학연에 신경 쓰지 않는 나도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인사하고 싶어 진다. 선배님, 노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서.


<겨우살이>의 화자가 봄을 기다리며 노래하듯, 오랜 시간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고서 책이 나오자 내게도 봄이 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학연, 지연, 혈연에 크게 의지하지 않는 나라고 하더라도 출간 후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책을 알리고 팔아야만 했다. 그렇게 첫 책을 내고서는 페이스북에 있는 고등학교 동문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안녕하세요 선후배동기님들, 저는 25기 졸업생으로 이번에 책을 내게 되어..."


내가 이렇게나 비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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