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이면 돼 잠깐이면

by 이경


살면서 후회되는 일이 한두 가지겠냐마는 주변에서 해보라고 해보라고 권유했던 것 중에 내 고집과 아집으로 안 해요 안 해요 했던 일을 꼽으라면 역시나 젊은 시절의 여행이다.


특히 해외여행.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해보고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어릴 때는 왜 그렇게 잔소리처럼 들렸는지 몰라. 아니, 뭐 외국 사람들도 우리랑 똑같이 먹고 자고 싸고 하겠지, 다를 게 뭐 있을까. 굳이 해외 가고 싶으면 가까운 이태원에 가보면 되지.


놀랍게도 어릴 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젊은 시절의 배낭여행, 그거 그저 사서 고생하는 일처럼 여겼달까. 멀쩡한 집 놔두고 왜 배낭 같은 걸 매고 다니는 거람.


나이 서른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처음 비행기를 탔으니까 말 다했지. 결혼 전 지인들과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어째서인지 그마저도 목포항에서 배를 타고 가게 되었으니,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생애 첫 비행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신혼여행으로 첫 비행을 했다. 아내는 비행기에 올라서는 나에게 신발을 벗고 타야 한다며 농을 치기도 했다. 나쁜 사람.


신혼여행지는 프랑스 파리와 스위스의 몇 개 도시들이었다. 파리는 더러웠지만 낭만이 있었고, 스위스는 모든 게 깨끗해서 좋았다. 신혼여행지는 철저하게 아내의 선택이었는데, 나는 네팔에 가서 트레킹을 하자는 의견을 내었으나 역시나 철저하게 묵살당했다. 지금은 아내의 선택이 몹시 훌륭했다고 여긴다. 현명한 사람.


신혼여행으로 첫 비행을 하고 나서는 기회가 닿는다면 자주 나가고 싶어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지를 다룬 책을 읽으며 먹을 것과 볼 것에 대한 계획을 짜는 일이 재밌어졌으니, 뒤늦게 해외여행의 묘미에 빠진 셈이다.


중국 유학생 출신의 아내와 상해에 갔을 때는 중국 문화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 아내를 지치게 만들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상해 시내에 들어선 후 횡단보도 파란불에 건너려는데 차들이 빵빵거리면서 나를 치고 갈 뻔했기 때문이다. 혹시 중국에서는 신호 체계가 다른가도 싶었지만 아내 말로는 중국 사람들이 원래 좀 그런 구석이 있다고. 그때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으니 이제 중국 운전자들도 보행자를 좀 배려하려나.


하와이에 손위 처남이 살고 있어서 천국과도 같은 날씨 속에서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얼음을 갈아 색소를 뿌린 쉐이브 아이스크림은 세상 어떤 빙수보다 시원하고 맛있었다. 오바마 대통령도 즐겨먹었다지? 하와이에 가기 전엔 하나의 휴양지에 불과하겠거니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하와이 맥도날드에서는 밥도 나오는걸 보고서는 이곳이라면 평생 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하와이, 하와이 말하는 이유를 직접 보고서야 깨달았다. 천국과도 같은 그곳을 죽기 전에 한번 더 가볼 수 있을까?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여행지를 나라가 아닌 도시로 구분한다던데, 가까운 일본을 몇 번 다녀오면서 그 말뜻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나고야로 들어간 후 기차를 타고 간사이 지방으로 옮겨 나라, 고베, 교토, 오사카를 둘러보았다. 그 후에는 후쿠오카, 소도시 구라시키, 오카야마를 다녀오기도 했고, 장모님을 모시고는 오키나와에 가서 차를 렌트해 며칠 돌아다니기도 했다. 각 도시마다 먹거리나 풍광이 달라 재밌었다.


부모님이 환갑이 되었을 때는 형네 가족과 함께 괌을 다녀오기도 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온 가족이 떠난 해외여행이었다. 태풍이 오는 바람에 꼬박 하루를 호텔 안에서 지내야만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 또한 추억이 되었다. 코로나 시대 이전에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탄 것은 외국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단 둘이 다녀온 제주도였다. 결혼 전 배 타고 입도했던 제주도를 10년이 지나 비행기를 타고서 다시 다녀온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아아, 여행 가고 싶다. 기내식 먹고 싶다. 공항 냄새 맡고 싶고, 구름 위를 날고 싶어. 코로나바이러스로 몇 년간 하늘길이 막히면서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릴러말즈의 <Trip>을 즐겨 들었다.


릴러말즈는 커리어가 독특한 뮤지션인데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이면서 엘리트코스를 밟다가 학창 시절 힙합에 빠져, 지금은 랩도 하고 노래도 하고 프로듀싱도 하면서 여전히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한다. 유튜브에는 2019년 한 클럽에서 공연한 <Trip>의 영상이 있는데, 곡 중반에 릴러말즈가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하고, 관중들 처음부터 끝까지 떼창을 하는데 이게 참 아름답다.


릴러말즈의 <Trip>은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를 이을만한 뛰어난 여행가라고 생각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즐겨 들었던 곡이라서 그런지 듣고 있으면 묘하게도 조금은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울적함의 이유로는 '잠깐이면 돼, 잠깐이면' 하는 마법 같은 가사가 한몫하는 거 같기도 하고.


<Trip>에는 여성 보컬 한나가 피처링하기도 했는데, 전체적인 가사를 보고 있으면 단순히 여행만을 노래한다기보다, 누군가의 만남과 이별을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겠다고, 이제는 떠나고 싶다고. 잠깐 동안의 외도나 바람을 노래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니 나 잠깐 어디 다녀오겠다, 하는 멘트는 청자의 상황에 따라서는 서글프게 들리기도 한다. 한참 릴러말즈를 듣던 어느 해에는 며칠간 병원 신세를 진 일도 있는데 그때에도 <Trip>을 들으면서, 가족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읊조리기도 했다. 나 잠깐만 병원에 다녀올게, 나 잠깐만 아프다가 올게. 잠깐이면 돼, 잠깐이면.


뭐, 생각하면 삶이란 것 자체가 하나의 길고도 짧은 여행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릴러말즈는 <Trip>에서 먹고 보는걸 모두 느끼고 곡으로 쓰겠다고 노래하는데, 나는 이제 여행을 떠난다면 가서 먹고 보는 걸 모두 글로 쓸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어릴 때는 여행 에세이가 그렇게 인기 있었는데, 진작에 여행에 재미를 붙였다면 이른 나이에 멋진 여행 에세이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 진다. 이런 생각이 드니 역시 젊은 시절 미지의 세계에 호기심을 갖지 않았던 게 후회스럽다.


결혼을 좀 더 일찍 했어야 했나?



keyword
작가의 이전글깊은 바다로의 다이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