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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Sep 21. 2022

브런치에는 국어 선생님이 많다




몇 년 동안 브런치를 하면서 느끼는 건데, 이곳에는 유독 국어 선생님들이 많은 것 같다. 직업상 늘 글을 다루는 게 일이다 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나는 걸까 싶기도 하고, 과거에 분명 문학소녀소년이었던 분들도 있는 거겠지.


현역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오랜 시간 교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은퇴를 하시고는 노년을 보내는 분도 보인다. 때로는 이런 선생님들과 교류를 하면서 댓글을 주고받기도 하는데, 가방끈이 짧은 나로서는 글을 쓰고 책이나 쓰니까 이런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지, 언제 이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국어 선생님들이 내가 쓴 글을 읽고서, 글이 좋다거나 재밌다고 칭찬을 해주면 뭔가 좀 더 신기하고 뿌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힘 빼고 스윙스윙 랄랄라>라는 책을 내고서는 골프를 막 시작한 한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이 책 재밌게 읽었다고, 좋은 책 내주어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셔서, 에에, 교수님 정말 제 책이 좋았나요, 하고서 묻고 싶기도 했다. 뭔가 글을 다루는 전문가에게 인정받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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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지망생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아, 저 집단의 사람들은 글을 잘 쓰는구나 싶은 직업군이 두 곳 있는데 하나가 기자이고 하나가 국어 교사이다.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에 비해 비문이 적어서인지 평소 늘 글을 다루는 사람들의 글은 뭔가 믿고 읽을만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믿음과는 별개로 때로는 그들에게서 인간적인 모습도 볼 수 있다. 어릴 때는 국어 선생님이라고 하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같은 거 되게 잘 알겠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틀리게 쓰는 일이 있어서, 아 국어 선생님이라고 완벽하진 않구나, 저분들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분들도 계신다.


글이 아닌 생활을 보고 있자면 그런 인간미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어떤 국어 선생님은 우울증을 앓고 있고, 또 어떤 국어 선생님은 투병 생활을 하며 그 내용을 책으로 내기도 하셨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분도 보았고, 그 반대의 분도 보았다. 자기 글을 쓰고 싶다며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작가 지망생 국어 선생님도 보았고, 자비출판을 하신 선생님도 보았다. 여전히 문학서를 읽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자기 계발서를 탐독하며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국어 선생님의 글을 읽기도 했다.


브런치에서 이렇게 다양한 국어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아 이분들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어 진다. 그저 다른 직업군에 비해 글을 조금 더 잘 쓰는 분들이지만, 남들과 똑같이 웃고 울고, 희로애락을 느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럼에도 여전히 국어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은 신기하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만났던 국어 선생님들보다 많은 숫자의 국어 선생님들을 이곳에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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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게 되는 사람들, 그러니까 작가를 꿈꾸는 많은 이들은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의 영향도 분명 받는 거겠지. 중학교 2학년 때는 국어 선생님이 담임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그는 국어를 가르치는 일보다 아이들에게 농구 시합을 시키는 일에 더 재미를 붙였다. 당시에는 한 반에 50명 정도 되었으니 몇 개의 팀을 만들어 1년 내내 리그 시합을 펼치게 했던 것이다. 미 프로농구 NBA나 만화책 <슬램덩크> 등이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이 선생님의 이야기는 내 책 <힘 빼고 스윙스윙 랄랄라>의 한 꼭지가 되기도 했다.


역시나 중학교 시절 광주 출신의 한 여자 국어 선생님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는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선생님은 수업이 무료해지면 가끔 아이들에게 노래를 시키기도 했는데 한 번은 김수희의 <남행열차>를 그 앞에서 불러 그에게서 미소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 물총을 교탁 위에 올려놓고 떠드는 아이들을 향해 쏘기도 했는데, 교탁 앞에 앉아 있던 내가 물총의 총구를 반대 방향으로 바꾸어 놓은 장난을 친 적도 있다. 물총의 물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자 범인이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매타작이 흔하던 시대였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자주 때리는 그였는데, 그는 매가 아닌 웃음으로 그 일을 넘겼다. 교과서에 나오는 한 희곡을 공부할 때는 여러 학생들이 역할을 부여받고 글을 읽었는데, 나는 정말 연기톤으로 사자(使者)의 역할을 소화했고 선생님은 나에게 판토마임이나 연기를 배워볼 생각이 없냐고 묻기도 했다. 생각하면 그때 나는 이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 선생님의 이야기는 데뷔작 <작가님? 작가님!>의 한 꼭지가 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도 기억에 남는 국어 선생님이 있다. 2학년 때 처음 만난 안 선생님은 등장부터가 심상찮았는데 개량한복을 입고서는 한 손에는 교과서, 한 손에는 쇠젓가락을 들고서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그의 첫 모습이었다. "내가 이 쇠젓가락을 던져서 저 벽에 꽂아보겠어."라는 말을 할 때는 미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그가 던진 젓가락이 교실 뒤편 게시판에 박혔을 때 어느 산에서 수련을 하다가 내려오신 걸까 싶기도 했다. 그가 인생 최고 소설로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을 꼽았을 때는 여름방학시간을 빌어 그 궁금증을 풀기도 했다. 그는 가끔 언어유희로 짖꿎은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학우 중에 '조재욱'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는 그에게서 몹쓸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너는 좆을 째고 욱 소리를 내서 이름이 조재욱이니?" 하는 식이었다. 그는 가끔 재밌었고, 가끔은 싫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골리는 것 못지않게 아이들도 선생님을 놀려대던 시절이었다. 한 국어 선생님의 별명은 안타깝게도 '아가리 똥내'였다. 특히 맨 앞줄에서 수업을 듣는 아이들은 그의 수업을 듣는 걸 힘겨워했다. 실제로 그가 수업을 할 때 입에서 악취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설령 가끔 냄새가 난다 하더라도, 좁은 교실에서 하루 종일 말 안 듣는 학생들을 상대로 떠들어야 하는 직업이었고, 어쩌면 구내염 같은 병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살면서 만난 몇몇 국어 선생님들은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고 때로 책의 일부가 되기도 했던 걸 보면, 나 역시 분명 그들에게서 적잖은 영향을 받아온 것 같다. 브런치에서 활동하는 많은 국어 선생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문득 옛 국어 선생님들이 떠오른다. 근데 그분들 다들 잘 지내고 계실까. 


생각하니 20년도 훌쩍 지난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선생님, 저 책을 네 권이나 내었고, 저를 작가라고 불러주는 사람들도 생겼어요,라고 말하면 환히 웃어주실 분이 한 명쯤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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