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스물하나

by 이경




생리 도벽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점심을 먹고 들른 매점에서 계산하지 않고 물건을 들고나가는 모습을 우연찮게 보았고,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그가 말한 이유라는 게 그랬으니까. 머리를 녹색으로 염색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그를 '녹대가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3 취업생으로 공장에 들어왔다던가.


그가 훔친 물건이라는 게 딱히 비싼 건 아니었다. 맥스봉 소시지. 웃기지도 않지. 훔치려면 좀 더 값나는 걸 훔치는 게 더 기분 좋지 않을까? 걸리면 위험하니까 이제 그러지 말라구.


녹대가리는 생산라인에서 휴대폰을 조립했고 나는 자재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녹대가리에게 일을 시키려면 매일 그를 봐야만 했다. 그날 이후로 자재와 함께 맥스봉 소시지를 그의 자리에 놓아주었다. 때로는 무심한 척 작업복 주머니에 푸욱 찔러주기도 했고.


가끔 일이 바빠 소시지를 챙겨주지 못한 다음날에는, 왜 어제는 소시지가 없었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뭐 나한테 맡겨놨나. 이게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그러고선 다시 또 매일 소시지를 챙겨주었다.


남자 친구가 있다구? 지방에? 나이도 어린 게 할 거 다 하네? 녹대가리라는 별명과 달리 귀엽게 생긴 녀석이었다. 코가 좀 복코였는데, 스스로는 그게 싫었는지 훗날 날씬하게 코 성형을 하기도 했다. 내가 그 복코를 얼마나 귀여워했는지도 모르구서.


남자 친구도 있는 녀석에게 자꾸만 잘해줄 필요가 있나. 깊어지면 나만 힘들어지지. 이제 그만두어야지. 머리도 녹색인 날라리 녀석, 이제 그만이다, 하고서 소시지 공납을 그만두었다.


공장이라는 게 그래요. 노동자들의 삶이 고달프니까 주기적으로 회식을 해서 고기도 먹이고 술도 먹이고 해야 해. 소시지 공납을 멈춘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한 녹대가리는 "너는 이제 내가 궁금하지도 않냐?"라며 성을 내고서는 안겼다.


역시 날라리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너'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지방에 산다는 남자 친구와는 헤어졌다고 했다. 역시 안 보면 멀어지는 건가. 그렇게 공장 안에서 녹대가리와 연애를 시작했다. 환승 연애도 아니렷다. 연애 시작의 1등 공신은 맥스봉 소시지였다. 처음 보았을 때 녹색이었던 그의 머리는 계절이 변하면서 검게 변했다. 더 이상 누구도 그를 녹대가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3년 정도를 만났나. 회사를 먼저 그만둔 그를 보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틈이 생겼나 보다.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는 녀석에게, "나는 이런 걸로 농담하는 거 싫어해. 헤어지자고 하면 두 번 다시 안 볼 거야." 했다. 며칠 지나 다시 만나자는 연락에 미안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려올 줄 알았던 전화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공장이라는 게 또 그래요. 나름의 끈끈함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도 또 보게 된다니까.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 공장 퇴사자들 모임에서 녀석을 보았는데, 옆에는 남자 친구라고 하나를 데리고 왔다. 또 어디서 멸치같이 생긴 걸 구해왔네. 마지막으로 통화할 때는 분명 울었는데. 뭐, 잘 사네, 다행이네, 이제 걱정 안 하고 살아도 되겠네, 싶었다.


둘이서 가장 멀리 떠난 여행지가 밤기차로 떠난 정동진 바다였다.

그날의 바다가 다정했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스물다섯이었고, 스물하나였다.


*이상의 단편 <봉별기>를 읽고서,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들으며 썼다.


--------------------------------------------------


다섯 번째 책, 음악 에세이 원고 퇴고 중이다...


출판사에 총 다섯 파트의 글을 보냈는데, 네 파트는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파트 하나는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꼭지로 치면 8꼭지 정도. 전면 수정이라니... 으으, 치욕적이다... 라고 처음엔 생각했지만, 그래도 총 다섯 파트 중에 네 파트 그냥 괜찮다고 이야기 나온 거면 뭐 괜찮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서 고생의 전형, 할로윈 할로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