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네가 그놈이냐?"
내 소개를 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다.
15년도 더 된 일이다.
시중에 구해볼 만한 음악 잡지는 락 위주의 [핫뮤직] 밖에 없던 시절이다. 힙합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PC 통신에 가입해 찾아 들어간 흑인음악 동호회. 최대 열 명이 모여 채팅을 할 수 있던 대화방에 그가 있었다.
"들을만한 외국 힙합 좀 추천해주세요."
"너티 바이 네이처(Naughty By Nature)를 추천합니다."
너티 바이 네이처... 너티 바이 네이처...
핫뮤직에서 이재현(현재 가리온의 MC메타)이라는 사람이 너티 바이 네이처는 퍼블릭 에네미(Public Enemy)의 아류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너티 바이 네이처는 퍼블릭 에네미 아류 아닌가요?"
나는 되물었고, 그는
"너티 바이 네이처가 PE의 아류라고???" 하며 흥분했다.
이게 그와 나의 첫 온라인 대화였다.
시간이 흘러 처음 나간 동호회 오프라인 모임에서 난 그 남자에게 내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대화방에서 너티 바이 네이처가 퍼블릭 에네미 아류 아니냐고 했었던..."
"아, 네가 그놈이냐?"
썩소를 가득 담은 얼굴로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한 대 맞을 줄 알았다. 여느 음악모임이 그렇듯 모이면 음악 얘기는 거의 안 하고 술 마시고 노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술을 마시고 적당한 취기를 가진 채 노래방에 갔다.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서로가 어색해하던 그 순간. 그 남자는 김현식의 <사랑했어요> 같은 곡들을 굉장히 '찰'지게 불렀다.
가수 지망생인가? 아니 어쩌면 개그맨 지망생일지도...착각이었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알게 됐지만 그는 랩을 하는 사람이었고 너티 바이 네이처의 <Hiphop Hooray>를 부를 때가 김현식의 곡을 부를 때보다 더 어울리고 멋진 사람이었다. 잡지 등을 통해 알게 된 얕은 지식으로 상대하기엔 음악을 직접 듣고 접하며 지내온 시간이 많은 사람이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에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던 나에게 그는 언더 신의 폐해와 오점 등을 하나하나 알려주며 음악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특히나 그는 "이리 나와. 나와 함께 손을 들고 놀자" 같은 별 내용 없는 프리스타일 랩을 혐오했었고 나는 그런 그가 프리스타일 랩은 못 한다고 생각했었다. 두 번째 착각이었다.
어느 날인가 동호회에선 다시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고 신촌 클럽 마스터플랜에 모여 프리스타일 랩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려 나가던 ‘스컬’이라는 형은 무대에 올라 그 남자를 가리키며 ‘목 짧고 얼굴 큰 MC’라고 놀렸고 내가 아는 그 남자라면 분명 프리스타일 무대에 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스컬에 이어 마이크를 잡고 프리스타일 랩을 했다. 내가 본 그의 첫 프리스타일이었고 지금껏 봐온 가장 멋진 프리스타일이었다.
하루는 그와 함께 일산에 사는 지인의 집에 갔다. 지하 복층으로 이뤄진 그 집 지하실엔 조그마한 바가 있었고 그 남자와 친구 몇은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남자는 래퍼 피타입을 처음 만났던 이야기와 평소 궁금했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들려줬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십 년 후에 이런 바가 있는 작업실 하나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결혼까지 한 그의 집에는 젊은 시절 꿈꾸던 그런 바가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그 남자는 온라인에 발표했던 곡들과 신곡을 묶어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나와 그 남자는 연락이 뜸해졌고 아는 형, 동생 사이에서 뮤지션과 팬의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한동안 그의 앨범을 듣다가 친구를 통해 간간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군대에 갔다더라.
영어 강사를 한다더라.
음악은 그만뒀다더라.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더라.
몇 년이 흘러 그는 두 번째 앨범을 발매했고 나는 그의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 전에 그는 나와는 친구 사이인 백업 래퍼 디테오(D.Theo)와 함께 홍대 놀이터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습에 한창이던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형 저..."
"우와! 경화다. 이게 얼마만이야." 하며 그는 나를 반겨 주었다.
긴 시간이었지만 내 이름과 얼굴을 까먹지 않고 기억해주는 게 왠지 고마웠고 그날 나는 실로 오랜만에 힙합 공연을 즐겼다.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어쩐지 어색한 기분에 난 집으로 곧장 돌아갔고 그 남자는 디테오를 통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경화야 같이 놀면 좋을 텐데. 다음에 같이 술 한 잔 먹자."
내가 알던 그는 그렇다. 뭔가 시니컬하면서도 따듯한 구석이 있고 유쾌하면서도 날카로운 사람.
그와 음악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힙합 외의 음악에 대해 많이 물어봤었다.
"형. 형은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천재라고 생각해요?"
"커트는 천재라기보단... 그 시대의 영웅이었던 거 같은데?"
커트 코베인을 시대적 영웅으로 표현하는 사람. 그 또한 좀 더 시간이 흐르면 한국 힙합 신에 영웅 정도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만 아는 이야기의 그는 유엠씨(UMC)라는 이름으로 혹은 유엠씨유위(UMC/UW)라는 이름으로 몇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현재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를 진행하며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회 전 분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써두었던 글임을 알립니다.
2009년 혹은 2010년 정도에 힙합플레이야닷컴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