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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고 왔다

by 이경



점심으로 고등어구이를 먹고서는 사진관에 들러 반명함 사진을 찍고 왔다. 다음 달에 한 도서관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진행하려면 강연계획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계획서에 저자 사진을 넣게 되어 있는 거라...


스노우 필터 먹여서 꽃미남 버전으로 제출할까 하다가, 그거는 사기잖아...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그런 구라 사진을 보고서 실물을 본다면 깜짝 놀라실 거 아니야... 어머, 작가님,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어제는 PPT 파일도 좀 만들어보고, 강연 계획서 등등 빈칸을 요래저래 채워보니까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게 저자 얼굴 넣는 거여... 그래서 아무래도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어야 되겠다 싶은 거였지...


어제도 못생긴 얼굴 오늘도 여전히 못생겨가지고, 사진관에 못 가고 있다고 하니까 친절한 페친 정현쌤께서 이런 꿀팁을 남겨주셨다구.


'일단 오늘 정성스런 세안후에 괄사로 쫙쫙 혈을 풀어주시고 팩도 좀 하시고 그래 보세여.. 언뜻 스치듯 본 사진의 기억으론 그렇게 걱정하실 외모는 아니시던데.. 우쭈쭈 둥가둥가'


헤헤헷. 내가 어제 징짜 큰맘 먹고 정성스럽게 세안을 했다구. 근데 괄사가 뭔지 모르겠는 거여... 나름 작가라는 인간이, 책도 다섯이나 낸 인간이... 저, 선생님 혹시 말씀하신 괄사라는 것이 무엇인지요... 하고 물어보기가 좀 부끄럽잖앙. 그래서 인터넷에 쳐봤는데 아직 국어사전에는 등재가 안 된 단어 같더라구.


처음에는 정현쌤이 '괄시'를 오타내신 건가 했다니까. 마누라한테 괄시 좀 받아보라는 이야기이신가... 하고...


암튼 정현쌤이 꿀팁을 주셨는데도, 나는 세안까지만 하고, 혈을 풀어주는 것도 못하고, 팩도 못하고... 그랬엉... 저는 스킨로션도 안 바르는 글러먹은 생키라구요......


암튼 그럼에도 더 늦어지면 안 될 거 같아서 사진관에 갔다구. 내가 정장 가다마이 차려입을 정성까지 보이기는 어렵겠고, 무인양품에서 9,900원 주고 산 티쪼가리 입고서 거지처럼 하고 갔다구.

내가 입은 티쪼가리는 싸구려이지만, 제 가슴속에 불타고 있는 이 마음만큼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여러분... 헤헷.


사진관 사장님한테 가다마이 포토샵 해달라고 그럴까, 넥타이 포토샵 해달라고 그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사진 몇 방 찍더니, 안경이 반사가 많이 된다고 안경 좀 벗고 찍자는 거야. 그러면서 안경을 합성해 주시겠대... 하아...


사진관 사장님 하고는 일 때문에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사진 찍는다고 오랜만에 만난 거였거든. 근데 사장님이 사진 찍으면서 그러시더라고.


"살이 좀 빠지신 거 같아요."


내가 아주 오랜만에 사진을 찍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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